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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오리진 (판) 2017.10.10 04:11 조회167
톡톡 훈훈한 이야기 채널보기

딸기

이야, 봄나비가 따로 없구나야!”

하우스 일을 마치고 친구네 식당에 마실을 갔다가 순옥이가 야외테이블에 앉아있길래 나는 평소처럼 능글능글 농을 걸었다. 순옥이는 역시나 본체만체 고개를 픽 돌려버린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순옥이 앞에 마주앉아 객쩍게 집적거렸다.

예뻐지는 약촐 달여 먹나? 어떻게 하루하루 이렇게 고와지나 응?”

순옥이는 뉘집 개가 짖나 하고 폰을 꺼내들고서 띵띵거리며 아예 딴짓을 한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그런 냉대와 콧방귀뿐인데 순옥이만 보면 왜 그렇게 자꾸 치근거리고 싶어지는지 나도 알 수 가 없다.

그때 식당 안주인이 나오며 나이 마흔이 넘었으면 좀 점잖아져봐, 하고 나에게 핀잔을 준다. 이집 안주인이나 바깥주인이나, 앞에 쌀쌀맞게 앉아있는 요 순옥이나 모두 한 마을 사람이요, 같은 학교 동창이다. 그래서 이 가게를 사랑방삼아 시적시적 모이기도 잘하고, 서로 티격태격 다투기도 잘한다.

저번에 그렇게 혼이 나고도 그래? 아무리 총각이 처녀한테 그러는 거라지만 사람이 배알도 없냐, 어째?”

안주인이 또 그 얘기를 꺼내며 으이그,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에 순옥이는 뺨을 쌜죽하며 내게서 등을 돌린다. 내가 혼이 났다는 건 몇 달 전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날 궁지에 몰아넣은 당사자는 앞에 앉아있는 요 순옥이였다. 머리로는 벌써 털어버린 일이지만 그때 요것한테 하도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누가 그 얘기를 다시 들먹이면 아직도 속이 좀 편치 못하다. 당시 일을 따져보자면 순옥이가 내게 백 번 사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어찌어찌하다보니 요 계집애는 고상한 피해자요, 나는 아주 꼴사나운 놈이 돼버렸다.

동네 동창 녀석들 몇이 저녁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순옥이를 불러내자고 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인데, 그 제안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동창인 이집 바깥주인 녀석이었다. 그날 가위바위보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내가 전화할 일은 없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참 재수도 없었다. 운없이 뽑힌 나는 그날 전활하게 되었고, 전화를 받은 순옥인 피곤해서 자야된다고 했다. 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내가 순옥이를 죽자사자 귀찮게 쫓아다니는 배알없는 놈이 돼있었다. 요게 별 것도 아닌 일에다 오방살을 잔뜩 붙여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것이었다.

술먹고 그러지 마라, 추태다야, 에라이 빙신아... 이런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친구들이 하는 소리야 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순옥이 고것이 얼마나 열심히 입방아를 찧고 다녔는지 내가 비닐하우스를 부쳐먹고 있는 땅주인 아주머니까지 그 일을 알고있는 것이었다.

여자가 싫다는데 너무 따라다닐 필요도 없어.’ 그 아주머니가 내게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차는데 어이구, 내가 태어나서 그때만큼 얼굴이 화끈거렸던 적이 없었다. 땅주인 아주머니는 나만 보면 젊은 총각이 보기 드물게 근하고 중하다고 매양 칭찬을 해주던 분이었고, 실제로도 나는 동네에서 궂은 일엔 팔 걷어부치고 말 날 일엔 죽은 듯 엎드리면서 평판 하나만큼은 차곡히 쌓아 마을청년회장에까지 올라온 몸이다. 그런데 고 계집애가 내 얼굴이 확 깎아놓은 것이었다.

내가 정말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면 덜 억울하겠다. 순옥인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내가 반할 만치 예쁜 얼굴도 아니다. 그리고 너무 빼빼 말라서 볼품있는 구석도 별로 없다

그날 같이 술먹던 녀석들이 좀 해명을 해줬으면 좋을 텐데, 이것들은 제 일이 아니라고 내가 하소연을 해도 그냥 실죽 웃고 만다. 이집 바깥주인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지 마누라가 순옥이 말만 듣고 날 추태꾼으로 모는데도 그거 뭐, 하고 만다.

나는 하도 약이 올라서 요 계집애 나타나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마침 고것이 식당에서 눈에 띄었다. 그런데 단단히 따져볼 생각으로 , 좀 보자!’ 했더니 이집 안주인은 그만하라고 내 옆구리를 쿡 지르고, 요 계집애는 그틈에 차를 타고 휭하니 내빼는 것이었다. , 정말 어이가 없어서!

난 싫다. 순옥인 남자들이 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망상하는 병이 있는데, 내가 그런 착각에 똥거름이 되기는 싫다. 혹시나 동네 총각놈들 중에 순옥일 마음에 두고 있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아니다. 순옥이가 맨날 날 벌레 취급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저를 좋아하겠나? 아무리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는 보잘 것 없는 노총각이지만 부모님이 물려준 인물 하나만큼은 내가 저보다 백 배는 낫다. 그리고 땅주인 아주머니가 올가을 땅이 비는 대로 오백 평을 더 빌려준다고 했으니 거기다 하우슬 너댓 동 지어놓으면 내년부턴 이것저것 빼도 일 년에 이천은 벌 수 있다. 잘만 되면 삼천까지도 거뜬하다. 뭐 큰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촌동네에서 그만큼 버는 사람도 흔치 않다. , 이 정도면 지네 엄마 바다그물 추리는 일에 손 하나 보태서 용돈이나 받아쓰는 그 노처녀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않은가?

저게 왜 저럴까, 곰곰이 짚어보니 내가 자길 굼실굼실 놀려댄다고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난 고것한테 복수당할 짓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았다. 좀 치근덕거리며 놀리긴 했어도 언제나 예쁘다, 곱다, 하면서 추어주기만 했지 깎아내리는 말은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작년 무슨무슨 데이인가 하는 날에는 식당 주인녀석이 순옥이한테 사탕을 주었다길래, 생전 안 해본 짓이었지만 나도 슈퍼에서 제일 커다란 사탕을 한 봉지 골라갖고 와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건네주기도 했다. 저가 나한테 고마워할 건 있어도 복수할 일은 없는 것이다. 망신당한 그일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약이 올라서 나는 하우스에서 혼자 일하다가 요 계집애야, 하고 그 아까운 모종을 똑똑 분지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를 갈던 내가 다시 예쁘네 어쩌네 하면서 순옥이에게 또 지분대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내 못난 탓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근 보름 동안을 말 한 마디 안하고 순옥일 원수 보듯 하고났더니 언친 것처럼 속이 영 답답해서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원하고 깨끗하게 항복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식당 안주인이 말했다.

순옥이 남자 생겼으니까 이제 그만 치근대.”

언젠 남자가 없었구?”

, 그런 소리는 골백번도 더 들었기 때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되받았다. 그러자 안주인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한 달 전에 친구한테 소개를 받았네, 천에 사는데 지난주에 순옥이가 홍천엘 다녀왔네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번엔 진짜란다. 정말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뭐 하는 놈이라는데?”

내 물음에 뜻밖에도 안주인 옆에 앉았던 순옥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집에서 선물 옵션 거래한다. 선물 옵션, 주식거래, 그런 거 알기나 하니?”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는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하지만, 요 계집애 거짓말은 원래 티가 안 난다.

니가 홍천엘 갔댔다구?

순옥인 낼름낼름 잘도 대답했다.

갔댔지.”

거기까지 먼데, 당일루?”

일박이일루.”

그집서 자고 왔다구?”

그럼 그집서 자지, 어디 길바닥에서 자겠니?”

역시... 요게 조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부끄러운 게 뭔지는 아는 계집앤데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또 거짓말인 게 뻔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어떤 놈인지 얼굴 좀 보게 한 번 델구나 와봐라.”

그런데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요게 어디다 전화를 걸더니만 자기야, 어쩌고 하면서 여우꼬리 배배 감는 소리를 해댔다. 내 예상과는 달리 어느 놈팽이랑 사귀고 있는 게 맞긴 맞는 것 같았다. 하여튼 밉상을 떨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계집애다. 내가 믿질 못한다고 면전에서 거기다 전화질을 해갖고는 코맹맹이 소릴 낼 건 뭔가? 나는 아니꼬워서 안 들으려고 바닥에 기어다니는 갯강구를 발로 툭툭 쫓아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요게 갑자기 지금 상구랑 같이 있어하는 것이었다. 저쪽 놈이 홍천 산다는 그놈이 분명할진데, 왜 거기다 뜬금없이 내 이름을 얘기하는가? 이것만도 황당해 죽겠는데 요 계집애는 한 술 더 떠서 너 좀 바꿔달래, 하면서 불쑥 전화기를 내게 디미는 것이었다. 난 지은 죄도 없는데 괜시리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심장이 벌렁거렸다. 얼떨결에 전화기를 받아드니 그쪽에서 대뜸 이런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요것이 나를 놓고 저쪽에다 무슨 말을 어떻게 일러바쳤을까, 하고 조마조마해졌다. 그러나 다행히 점잖은 말이 이어졌다. 그는 우리 동네가 참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고,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순박하다며 좋은 소리만 착착 골라서 한 다음 언제 한 번 내려가서 순옥이 친구분들한테 인사드리겠습니다, 하고 마치 내가 보자고 한 말을 다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중하게 얘기를 마쳤다. 나는 그저 예예, 하고만 있다가 얼른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순옥이는 그쪽에다 응응거리며 끝까지 눈꼴시게 교태를 떨었다. 그리곤 전화를 끊자마자 내겐 볼일을 다봤다는 듯 다시 획 돌아앉았다. 식당 안주인이 내게 눈썹을 치키며 킥킥거렸다.

거봐 맞지? 왜 못 믿어서 전화까지 하게 만들어?”

젠장, 저게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전활 한 거지 어디 내가 그러라고 했나? 이집 여편네는 왜 순옥이만 옆에 있으면 덩달아서 내게 암상맞게 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요렇게 멀뚱하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주식하는 놈 치고 패가망신 안 하는 놈을 못봤다!”

나는 툭 내뱉었다. 물론 그런 악담을 얌전히 듣고만 있으면 그것도 순옥이가 아니다.

지가 고추모에 붙은 진드기, 노린재 같은 거나 봤겠지 어디서 주식하는 사람을 봤다고?”

요 계집애도 그렇게 나를 콕 쪼았다.

열을 내봐야 나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속이 끓어올랐다. 고게 애인을 만들었다고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제깟 게 애인을 사귀든 영감을 사귀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왜 제멋대로 나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가 말이다. 어디 좋게나 얘기했겠는가? 안 보이는 데라고 아주 사람을 빈대 취급하며 깔깔댔을 게 뻔하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순옥이도 순옥이지만 그놈도 참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다. 지가 사는 데가 뭐 큰 도시라고 한 번 내려오네 마네 주절거리는가? 그래, 홍천은 위고 거진은 아래란 말인가? 우리 동네 거진은 그래도 앞에 바다가 탁 트여있어서 군함도 둥둥 떠다니지만 홍천은 사방이 산으로만 뱅뱅 둘러싸여 있는 곳이잖는가. , 지역적으로 보자면 그놈 사는 곳이 더 깡촌이요, 그런 고로 사람으로 보재도 나보다 그놈이 더 촌놈인 것이다.

그 이후로 난 또 다시 순옥이와 말을 끊었다. 이번엔 먼저 번처럼 집적거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순옥이를 보면 뱃속에서 성냥이 딱 켜진 것처럼 장난기가 일었는데, 이젠 그런 불꽃이 더 이상 튀어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내몸이 뭐에 쫄딱 젖어버리기나 한 듯이 말이다. 나는 참새 앞의 늙은 백구마냥 데면데면해졌다. 고것이 식당 야외테이블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어댈 때에는 다른 테이블로 멀찍이 옮겨 앉아 신문을 읽었고, 영 시끄럽게 굴 때에는 아주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는 고 계집애랑 상종하기 싫어서 식당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예 마주치기 않을 수는 없었다. 서로 동네는 달라도 내가 큰 길을 나서려면 순옥이가 사는 집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집 앞은 좁은 커브길인데다가 속도 방지턱까지 툭 불거져 있어서 트럭을 쌩쌩 내달리지도 못하고, 또 그집이 꺾어지는 안쪽으로 붙어있어 운전대를 쥐고 있는 한 눈을 딴 데로 돌릴래야 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담장 같지도 않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담장 너머로 요 계집애가 그물을 추리고 있는 걸 내가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 계집애가 운전석에 앉은 나를 마당에서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참 이상하게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니 계집애가 더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집을 지나칠 때뿐만 아니라 철물점에서 뭘 사고 나올 때도 보이고, 농협 안에서도 번호표를 뽑아 기다릴 때도 내 앞 순번으로 서있고, 심지어는 생전 안 나타나던 우리 하우스 모종밭에까지 나타나 동네 아줌마랑 헤헤거리며 내 앞을 지나가기도 했다. 또 요게 나를 볼 때 마다 전에 없이 생긋이 웃어보이기도 하고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기도 하는데, 그걸 보면 애인인지 뭔지가 생겼다고 자랑질에 아주 안달이 나서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는 순옥이네 집앞을 지나다가 마주오는 경운기 때문에 트럭을 탱자나무 담장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계집애가 마당 평상에 앉아서 뭘 집어먹고 있다가 나를 봤다.

", 어디 가니?”

야멸차게 흥흥거리기만 하던 때가 언제냐는 듯 요게 이젠 먼저 말까지 붙여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남이야 어딜 가든!”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순옥이는 뭐가 우스운지 저 혼자 킥킥 웃고는 또 물었다.

느 집은 딸기 안 심냐?”

슬쩍 보니 요게 앉아서 집어먹고 있는 게 딸기였다.

난 그런 거 안 심는다.”

? 난 딸기가 젤루 맛있는데?”

맛있으면 지가 심어서 따먹든가 말든가!”

그랬더니 요게 제 입에 넣었던 딸기를 쪽 뽑아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하나 주까?”

참 나, 애인인지 뭔지가 생기더니만 계집애가 이젠 야살스러운 짓에도 아주 스스럼이 없어졌다.

너나 많이 먹어라.”

나는 괜히 얼굴이 뜨끈해서 기어를 넣고 트럭을 출발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뭔가가 날아와서 내 뺨을 척 때렸다. 요게 디밀던 딸기를 나한테 던진 것이었다.

이게 미쳤나!”

나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혹시 그집 엄마가 안에 있을까봐 큰 소리는 못내고 화내는 시늉만 했다. 순옥인 헤헤 웃으며 집안으로 쏙 도망쳤다. 저것도 속을 들여다보면 참 실없고 주책맞은 계집애다. 아무리 말뿐이라지만 맨날 순옥이, 순옥이 하면서 떠받들어줬던 나도 참 한심한 놈이고.

뺨을 문지르니 손바닥에 벌긋한 딸기물이 묻어났다. 여기엔 고 계집애가 발라놓은 침도 잔뜩 섞여 있을 것이다. 나는 기분이 묘해서 바지 위에 떨어진 딸기를 얼른 창밖으로 내던지고 볼에 묻은 것도 쓱쓱 문질러 없앴다.

이삼 주 지나자 적어도 머릿속에서만큼은 그 얄미운 계집애를 보는 일이 없어졌다. 해수 사우나 가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어쩌다 한 번씩 갔지만 근간에는 사나흘에 한 번씩은 꼭꼭 들렀다. 그 사우나는 해변가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거기에 맛을 들인 이유는 시설이 좋아서도 아니고 뜨뜻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사우나 카운터 여직원 때문이었다. 예쁘기도 예쁘지만 얼마나 싹싹하고 친절한지 들락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이 사탕도 쥐어주고 우리 며느리 하지, 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 찔러보기도 한다. 노인네들처럼 넉살을 부리지는 못해도 나 또한 지날 때마다 안에 사람 많나요, 하고 묻지 않아도 될 걸 괜히 물어보며 주변머리껏 한 마디씩 말을 섞곤 했다. 주위 말을 들어보니 그 아가씨는 나이가 나보다 아홉 살이 아래고, 간성 시내 우체국 옆에서 슈퍼 겸 막걸리 도매를 하는 집 둘째딸이었다. 그댁 사람들이 원래 성품도 좋고 인물도 있다고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으며, 또 외조부는 예전에 어느 마을에서 군수까지 지냈던 분이라고 했다. 나 같은 농사꾼이 어쩔 수 있는 여자는 분명 아니었다. 그래도 저런 색시한테 장가들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보지 못할 것은 없는 일이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내가 가진 옷들 중에서 가장 좋은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다. 그리고 그 상냥한 미소를 볼 때면 그 아가씨가 내 색시가 되어 우리집 문간에서 날 환하게 맞아주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생김새는 미스코리아고 행동거지는 완전히 신사임당인데 말씀이야!”

나는 이 신선한 발견을 누구랑 나누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 식당에 앉아서 주인 녀석에게 순옥이를 띄울 때보다 백 배는 더 찬탄하며 그 아가씨를 칭찬했다.

, 이젠 순옥이 대신 그 여자한테 꽂히셨나?”

식당 안주인이 곁에서 마늘을 다듬다가 삐딱하게 끼어들었다.

, 오늘도 그 아가씨 얼굴 보러 사우나 다녀오는 길입니다. 누구처럼 비쩍 마르지도 않고 오동통해서 아주 딱 내 스타일이거든요.”

나는 근질거릴 게 뻔한 그 입으로 순옥이한테도 똑똑히 들려주라고 아주 큰 소리로 대꾸해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게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월초파일, 나는 아카시아 꽃이 흩날리는 산길을 걸어 무량사에 올라갔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어머니 대신 시주돈을 전하러 나선 길이었지만 이번엔 어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절에 꼭 다녀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전년도에 빌었던 것이 신통하게도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하우스 필름을 아주 비싼 걸 설치해놔서 그게 비바람에 찢어지지 일이 없도록 해주십사 빌었는데, 지난 여름 태풍에 남들 하우슨 날아가도 우리 건 멀쩡했다. 까치 놈이 벌레 쪼느라 천정에 구멍을 좀 낸 것을 빼면 우리 하우슨 지금도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올가을 오백 평을 빌려 작물을 늘굽니다...’

나는 절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새 하우스에서 작물이 병없이 크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번에 빌리는 땅에서 농사가 잘된다면 내후년쯤에는 그동안 모은 돈을 합해서 아예 내 땅을 사고, 그런 뒤엔 그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하우스 시설을 더 늘릴 계획이었다. 요즘엔 농사꾼이라도 재배 작물을 잘 고르고 규모를 크게 하면 부자 소리도 듣고 사장님 소리도 듣는다. 새로 빌리는 오백 평에서 계산만큼만 소출이 착착 나와서 해마다 면적을 늘려나간다면 나라고 그런 기업영농인이 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내가 고소득자로 새농민상 같은 거 하나 떡 받아쥐고 신문에라도 나면 사우나 아가씨 같은 여자도 날 그냥 흘려보지는 않을 테고, 딸 가진 부모들이 내 이름을 얘기해도 주눅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비시나?”

내가 머리를 들자마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순옥이가 팔짱을 끼고 샐샐 웃고 있었다. 멋쩍게시리 왜 남 꽁무니에서 기도하는 걸 보고 섰는가. 요 계집애가, 하고 을러주려다가 그래봐야 깔깔대기나 할 것 같아서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너 홍천으루 시집가서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순옥이는 역시나 믿지 않았다.

거짓말두 잘 한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하는 결혼인데, 잘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순옥인 입에서 샐쭉임을 걷어내고 뜻밖이라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 요 계집애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잘되라고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해놓고 나니 나도 꼭 진심을 얘기한 것처럼 가슴이 선선해졌다.

그럼, 나도 너 좋은 색시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주지 뭐.”

순옥이의 말에 나는 그래 고맙다, 건성으로 대꾸하고 절마당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흘끗 돌아보니 순옥이가 절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저렇게 진중할 때가 있었나 싶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정말 내 거짓말을 믿고 날 위해 뭘 빌고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시아 꽃이 널린 하얀 절길을 되돌아 내려올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쓸쓸해졌다.

밤나무에서 은행 안 열린다더니 그럼 그렇지, 요 계집애가 날 위해서 뭘 빌어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 말라죽으라고 눌림굿이나 벌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내가 식당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오후 망중한을 즐기고 때였다. 순옥이가 차에서 내리더니 불쑥 말하는 것이었다.

사우나 아가씨한테 너 얘기 했더니 그 체크무늬 남방 아저씨, 하고 금방 알더라.”

말문이 턱 막혔다. 보지 말아야 할 걸 몰래 훔쳐보다가 뒷덜미를 잡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쳤어? 니가 왜 거길 가서 내 얘길 해?”

나는 울그락불그락해져서 화를 냈다. 그랬더니 요게 천연덕스럽게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너 도와줄려구 그랬지. 니가 예쁘다구 엄청 칭찬하구 다닌다니까 그 아가씨가 고맙다구 전해달래드라.”

어이구, 개구리가 뱀 아가리를 봤대도 아마 나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랭이가 제초제를 뒤집어썼대도 아마 나처럼 노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우나를 오갈 때마다 한 마디씩 던졌던 모든 말들이, 슬쩍슬쩍 쳐다봤던 내 모든 눈길들이, 그동안 즐거움으로 삼았던 내 모든 공상들이 한순간에 불경스럽고 창피스런 죄악이 되어 모가지를 칵칵 조여왔다.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단 말인가. 그 아가씨 앞에서 나를 아예 홀딱 벗겨놓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척, 염소처럼 무구하고 땡한 눈을 하고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내편은 없었다.

고맙다고 전해달라는데 창피할 게 뭐 있어? 이번 기회에 남자답게 찾아가서 한 번 사귀어봅시다, 하면 되겠네.”

식당 주인내외는 이렇게 순옥이를 거들었다. 그래, 고맙다고 전해달란다고 이것들한테는 그 말이 곧이곧대로 감사인사로 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따져봐야 세 명이 다 주둥이를 내밀고서 남자가 대범치 못하네, 호랑이 눈썹은커녕 닭털도 못 뽑겠네, 하면서 몰아세우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후로 난 사우나에 발길을 끊어야 했다. 순옥이의 입김 한 방에 나의 유희가 썩은 감자처럼 뭉개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뭐, 그 아가씰 못본대서 애가 날 것까진 없었다. 애초부터 군수 댁 외손녀딸이란 나한텐 언감생심일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 아가씨와 마주칠까봐 늘 지나던 길을 두고 리조트를 돌아서 딴 길로 다니자니 몸이나 마음이나 영 편치가 않았다.

이제 나는 순옥이가 날 보고 슬쩍 웃기만 해도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면에 요 계집애는 낼모레 시집갈 날을 받아놓은 것처럼 들떠서 지냈다. 꽃향기에 취한 봄나비처럼 팔랑팔랑 걸어다녔고, 모래밭을 뒹구는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세상에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제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순옥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싶더니만 아주 통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놈과 아주 틀어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연애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듯이 왜 전화를 자주 안하느냐고 순옥이가 투정을 좀 부렸다는데, 고놈이 거기다 대고 주식값이 곤두박질쳐서 골치 아파 죽겠는데 왜 눈치도 없이 자꾸 귀찮게 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란다. 하하하, 한 번 수틀리면 백 년을 삐지는 순옥이한테 그래놨으니 그 뒷얘기는 안 들어도 빤한 일이었다. 또 홍천 그놈이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순옥이가 지금까지 감춰오다 까발렸다는데, 그걸 보면 곤달걀이 꼬끼오 울지언정 그 맘은 돌아설 가망이 없는 것이었다. , 맘을 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저가 늘 자랑하듯이 남잘 걷어찬 게 아니라 이번에는 거꾸로 자기 쪽에서 먼저 팽개쳐진 거니까.

거 봐라! 주식하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 있는가!’

나는 순옥이를 보면 요 말 한 마디를 꼭 해줘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동안 분수없이 까불어치던 고것이 꼬랑지를 납작 내리는 꼴을 반드시 보고 싶었다.

해질 무렵, 드디어 기회가 왔다. 경운기를 몰고 가다보니 순옥이가 자기집 마당에 혼자 쭈그려 앉아 그물을 추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예 시동까지 꺼서 경운기를 세워놓고 그집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목을 쭉 빼고는 순옥이 귀에 똑똑히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그러나 순옥이 엄마가 있을지도 모르는 방안까지는 들리지 않게 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 너 이젠 홍천 안 간다며?”

순옥이는 등을 돌린 채 바쁜 척 그물만 손질했다. 그런데 요게 평소처럼 찬바람을 쌩쌩 쏘아대면 나도 좀 신이 나서 놀려주겠는데, 발그스름한 저녁놀에 물들어서 그런지 어딘가 좀 더 야위어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별로 밉살을 떨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맥없는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꼼지락꼼지락 그물 추리는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러잖아도 요즘 마음이 안 좋을 텐데 사내자식이 돼갖고 거기다 이죽거리는 건 아무리 장난이라도 채신머리 없는 짓 같았다. 또 그동안 순옥이한테 당한 게 많긴 하지만 이런 때 건성으로라도 위로의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으면 그게 어디 한 마을 동갑끼리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떻게 위로해줄까 잠깐 궁리하다가 부아 섞인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근데 그놈의 자식은 우리 순옥일 뭘로 보고 함부로 까불었대! 내 눈에 띄었으면 아주 논두렁에 대가릴 확 처박아놓을 텐데, 그런 놈은! 에이, 분수도 모르는 자식 말이야!”

그러자 순옥이는 그물을 탁 놓고 일어나더니 아주 눈알이 돌아갈 만치 무섭게 나를 흘겨보았다. 그리곤 휙 등을 돌려 뒤란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면서 손바닥으로 볼을 쭉 문질러내렸는데, 그걸 보면 눈물까지 흘리는 게 분명했다. 순옥이가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기분 좀 풀어주려고 한 말을 갖고 저렇게 파르르 떨 건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겸연쩍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다. 객쩍은 소리나 지껄일 줄 알았지, 정작 필요한 때는 마치맞게 말을 못하는 이 촌놈의 주둥이...

그렇게 순옥이에게 눈물까지 빼놨으니 앙갚음으로 보자면 회초리로 맞았다고 홍두께로 패버린 셈이었다. 나는 영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순옥이를 놀리고 화나게 한 적은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속까지 멍들게 한 적은 없었다.

내가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널 좀 위로해주려고 그랬다, 순옥아.’

이렇게 사과도 해볼까 했지만 혀에 기름칠을 한대도 이 촌놈의 입에서 그런 다정한 소리는 도저히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날 더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순옥이의 태도였다. 늘 하던 대로 콕콕 쏘던가, 아니면 욕이라도 던진다면 내 맘이 좀 가벼워지겠는데, 순옥인 나와 마주칠 때면 오히려 산 너머 구름 보듯이 그윽한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받는 소는 소리를 내지 않는 법이라고, 이게 나한테 단단히 앙심을 품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해야 할 놈이 어이쿠, 또 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마른 쭉정이에서도 싹이 날 만큼 햇살이 따끈따끈한 날이었다. 내가 식당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순옥이가 유리창 밖에서 날씨 참 좋다, 하며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쭉 켰는데, 강낭콩 줄기처럼 싱그럽게 뻗어올라가는 그 모습을 보자 내 뱃속에서는 한동안 잠자고 있던 성냥불이 다시 딱 켜졌고,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이 속없는 놈이 순옥이 뒤로 몰래 다가가 어깨에다 슬며시 팔을 두른 것이었다. 언제나 말로만 희롱했지 서로 손 한 번 제대로 부딪쳐본 적도 없었던지라 순옥이는 화들짝 놀라서 내 팔을 쳐냈다. 그러나 사실 순옥이보다 내가 더 놀랐다. 빼빼 말라서 그저 뼈만 있을 줄 알았는데, 순옥이 어깨가 시루떡보다 말랑하고 새털보다 보드라웠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 팔에 닿았던 그 감촉을 생각하면 실실 웃음이 떠올랐지만 그런 즐거움은 잠시 뿐, 또 소문이 날까봐 더럭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제 무덤을 잘 파는 놈도 참 드물 것이다. 지난번에 순옥이가 낸 소문 때문에 그렇게 망신을 당했으면서 또 말 날 짓을 하다니. 그래도 그땐 누가 뭐래도 내속으로는 떳떳한 마음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요즘처럼 법이 무서운 때에는 까딱하면 수갑을 차고 잡혀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순옥이가 입을 벙긋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동네를 다니느니 차라리 어디 아무도 모르는 데로 이사를 가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는데 이상하게도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옥이는 언제나 식당 안주인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건만 그 여편네도 그 얘기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식당에 발길을 끊고 죽은 듯이 농사일에만 매달렸다. 그것이 내가 한 짓을 잊는 길이요, 순옥이에게 속죄하는 길이요, 또 다른 실수를 막는 길이었다. 또 사실 일이 바쁘기도 했다. 삼월에 심었던 고추모가 이젠 다 자라서 여기저기로 모종 배달을 다녀야 했고, 빈 고추모 자리에 토마토를 심을 채비도 해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올가을 새로 지을 하우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중고 하우스대도 사러다니고, 대출에 필요한 서류도 이것저것 알아봐야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갑자기 모든 것이 딱 멈춰버렸다. 일도 멈추고, 생각도 멈추고, 세상도 멈춰버렸다. 땅주인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올가을 빌려주기로 한 땅 있잖아? 서울 사는 사촌 조카가 있는데, 자기가 내려와서 뭘 심어보겠다고 그걸 자길 달라네. 하여튼 미안하게 됐어.”

아주머니는 하우스에 찾아와서 그렇게 얘기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땅이 비면 날 주겠다고 재작년부터 얘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도장을 찍어서 계약을 해둔 것도 아니고, 딴 사람도 아닌 자기 사촌 조카 주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더구나 지금 내가 부쳐먹고 있는 토지도 그 아줌마 땅인 것을. 한순간에 기업영농인의 꿈이 날아가버렸지만 나는 아줌마 꽁무니에 대고 그럼 그러셔야죠,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 다 갖고 있는 땅뙈기가 왜 우리집엔 손바닥만큼도 없대요?”

나는 괜히 죄없는 어머니한테 가서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모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식당에 가서 내맘대로 술병을 꺼내다 앉았다.

술도 잘 못하는 놈이 대낮부터 웬 술타령인가 하고 그집 내외는 눈이 동그레졌다. 주인 녀석이 안주거리를 갖다주며 이놈이 미쳤나, 하며 타박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대답을 하려니 헛웃음만 났다. 나는 말없이 홀짝홀짝 술만 마셨다. 그러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주인 녀석이 차를 타고 어딜 갔다오더니만 내게 대뜸 물었다.

, 그 땅 때문에 그러지?”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에이, 자식두 하며 잔에 술을 따라준다. 술 한 병을 다 비울 때쯤 순옥이가 나타났다.

순옥이는 내 하는 꼴을 보더니 식당 마누라와 수군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술만 마셨다. 어디서 얘길 들었는지 잠시 후에는 땅주인 아주머니가 날 찾아왔다.

내가 상구 총각 속상하게 하려구 그랬겠나? 나두 그땅을 상구 총각 주고 싶었지. 근데 사촌 조카가 자기도 농사 한 번 지어보겠다니 어쩔 수가 있나?”

나는 섭섭도 하고 일부러 여기까지 날 찾아온 것이 무안하기도 했다.

저 신경쓰지 마세요. 전 그냥 술이 먹고 싶어서 먹는 거래요.”

이때 저쪽에 있던 순옥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눈을 땡그랗게 뜨고 아주머니에게 대뜸 따져들었다.

아니, 아줌마! 땅을 주기루 했으면 줘야지, 왜 딴 사람을 줘요? 쟤가 아줌마한테 얼마나 잘했어요? 하우스 수확할 때마다 고추며 상추며 몇 박스씩 꼭꼭 갖다주고, 일 생기면 공짜로 일해주고, 올봄에는 아줌마네 지붕도 새로 씌워줬다면서요! 말로는 그만한 총각 없다고 맨날 칭찬하신다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순옥이의 기세에 나는 알딸딸 올랐던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순옥이가 나말고 다른 사람한테 저렇게 암팡지게 구는 것도 첨 봤고,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첨 봤다. 순옥이의 야멸찬 폭격에 식당 내외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유, 그 땅 상구 총각 주면 될 거 아니야. 나두 동네에서 인심 잃는 거 싫어. 주께, 주께!”

그 말도 놀라웠지만 난 여전히 순옥이가 내 역성을 들어준 것이 더 놀라웠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순옥인 새침하게 고개를 틀더니 자기 차를 타고 쌩하니 사라졌다. 아주머니는 주께 응, 하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주머니가 땅을 나 준다고 아주 단단히 약속을 하고 돌아간 뒤, 나는 마음속으로 계획을 하나 세웠다. 하우스를 늘리면 내년엔 한 동은 뚝 떼어다 순옥이가 좋아하는 딸기를 꼭 심으리라.

자식이 무얼 그리 혼자서 실실 웃어?”

식당 주인녀석이 내 어깨를 툭 친다. 봄햇살을 타고 퍼져드는 향긋한 바다 내음에 내 가슴은 한껏 부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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