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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별 정치성향이 어떻든, Royal대인 성대.서강대와 해방한국의 주춧돌인 국민대, ...

윤진한 (판) 2017.11.15 06:32 조회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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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별 정치성향이 어떻든, Royal대인 성대.서강대와 해방한국의 주춧돌인 국민대, 인하대, 육사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국가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대학들에 해당됩니다. 


성대(국사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와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 윤허 대학 중 하나)는 세계사적 견지에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Royal대며, 해방한국의 틀을 유지할 비신분제 대학들로는 주춧돌에 해당되는 대학들이 독립투사들이 개입한 국민대, 인하대 및 Power Elite인 육사입니다. Power Elite인 육사는 초급대학인 남조선국방경비대 사관학교나,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부터 시작한 대학인데, 그 졸업생들이 권력중심부에 진입한 이후, 을사조약무효.한일병합 무효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중요시하는 행태를 보였고, 현행헌법에 반영된 임시정부의 법통도 육사출신 대통령들이 집권하던 시기에 반영되어 이렇게 필자가 조치한 것입니다.


이런건 사설 입시학원들이 예측하고 발표하는 입시점수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 중에 정치성향이 달라, 이전의 새누리당이나 더불어 민주당, 또는 국민의 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립을 해도, 국가체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들 대학은 성대 출신인 본인이 보기에 정말 필요한 대학들입니다.


자세한 의견은 다음 자료를 참조 바랍니다.



- 다 음 -




한국내 군사재판으로, 일본강점기 잔재청산 이전에는 국사교육(성균관),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국가적 정설(定說)과 헌법, 국제법등으로 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을 유지하면 될 것. 그리고 성대(국사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로, 6백년 역사 인정)와 같은 Royal대인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 중 하나) . 나머지는 비신분제 대학으로 의미 없음.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교육기구 성균관대= 국사교육에서 나타나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미군정당시 등록된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과 같은 개념임.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대학. 미군정당시 제사기구는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름.





[I]. 한국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가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으며,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학벌입니다.


1].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을사조약이 무효고,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등에 의해 원래부터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었습니다. 미군정령에 의해 복구된 성균관의 교육부문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공자님 제사는 현재의 성균관으로 계승됨)는 미군정당시부터 지금까지 국사 교육에 의해(국사에서 성균관을 정부 교육으로 시행해 옴),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최고 학벌 지위를 계승해오다가, 한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학술적 의견(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됨)에 의해, 법령으로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최고학벌 지위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면서,그 6백년 역사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시대, 전국 유림들이 모여서 전국 유림대회를 거친후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미군정에 등록된 대학이 성균관대입니다. 두 번의 유림대회가 있었음. 첫번째는 신문에 나타난바로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승만.김구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임시정부 요인이신 유학자 김 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함.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림대회가 있었음. 이후 미군정시대의 성균관장이시던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등록시키고, 성균관은 제사기구로 하여 교육기구인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 일본의 항복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헌법), 대일선전포고, 국제적 승인과정. 그리고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들 및 남북유림들이 결의한 성균관대 설립(이후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성균관대가 계승하게 됨), 국사편찬위에 나타난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교육기능이 계승됨)에 대한 역사교육.


. 대한민국 임시헌장. 출처는 법제처입니다.


1. 임시정부법령 제 1호.

대한민국임시헌장

[시행 1919.4.11.] [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4.11., 제정] 

     제0조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선 서 문

존경하고 경애하는 아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삼월일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히 아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야 본정부일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야 조직되었나니 본정부일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코 육력하야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바를 준수하야 국토 광복과 방기확고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자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이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유하는 일적의 혈이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가이요. 신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초이니라. 우리의 인도일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일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

정 강

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절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함.

5. 절대독립을 서도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

대한민국 원년 사월 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절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이하 생략...

* 필자 주 1). 구 황실 우대부분은 임시정부법령 제 2호(1919.9.11 시행)에 의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 1장 총령 제 7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불법 강제에 의한 한일합방조약 및 그 이전 이후의 일체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빚어진 대한제국 황실와해였기 때문, 임시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식정부가 아닌 임시정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소재지에 없는 구 황실을 우대하면서도 그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에 맞게 "민주공화제"를 도입한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구 황실 우대부분이 반영되지 않았어도, 1941년의 대일선전포고문에서 "1910년의 합병조약"등을 무효로 선포하여 1910년에 존재하던 구 황실을 존중하는 정신은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구 황실이든지,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든지 과거의 왕정체제를 계승하고자 하는것은, 카리스마적 현상으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님에 영향받음)에 등극한(성균관대 총확생회 게시판과 성대 유학대학 게시판에서 1백명 이상의 지지를 받아 등극하고, 이를 세상에 알려옴.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10년 넘게 세계적 매체인 트위터나 페이스북, 구글, 국내 포탈등에 알려옴) 필자 宮 성균관대 임금(윤진한, 성균관대 1983학번, 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주간)의 강력한 뜻입니다.  

2. 임시정부법령 제 2호.

대한민국임시헌장

[시행 1919.9.11.] [임시정부법령 제2호, 1919.9.11., 폐지제정] 

아대한인민은 아국이 독립국임과 아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도다.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였으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였도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대하야 2천만 민족의 성충을 합하야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조직된 대한민국의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하야 원년(1919) 4월 11일에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아 본임시헌법을 제정하야 써 공리를 창명하여 공익을 증진하며 국방 급 내치를 주비하며 정부의 기초를 견고하는 보장이 되게 하노라.


       제1장 총령

제1조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함.

제3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함.

제5조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 함.

제6조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내에서 임시대통령에게 전임함.

제7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이하 생략....

3. 대한민국임시헌법

[시행 1925.4.7.] [임시정부법령 제3호, 1925.4.7., 폐지제정] 

       제1장 대한민국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은 광복운동중에서 광복운동자가 전인민을 대표함.

       제2장 임시정부

제4조 임시정부는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통판함. 국무원은 10인 이내 5인 이상으로 함.

제5조 국무령은 국무회의를 대표하여 그 결정을 집행 우는 집행케 하고 임시의정원에 대하여 책임을 부함.

제6조 국무원은 국무회의의 일원으로 일체 국무를 의정함.

제7조 법률을 공포하며 명령을 발하며 법안을 제출하며 기타 중요문건을 발할 때는 국무령과 국무원의 연서로 함.

 

이하 생략...



4. 대한민국임시약헌

[시행 1927.4.11.] [임시정부법령 제4호, 1927.3.5., 폐지제정] 

       제1장 총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국권은 인민에게 있다. 단, 광복완성전에는 국권은 광복운동자 전체에게 있는 것으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다.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법률상 일체의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조국을 광복하고 사회를 개혁하며 약헌 및 법률을 지키고 병역과 조세 기타 일체의 의무를 부담한다.

       제2장 임시의정원

 

제5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의 직접선거한 의원으로서 조직한다. 단, 내지의 각선거구에서 의원을 선거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선거구에 원적을 두며 임시정부 소재지에 교거하는 광복운동자가 당해 각구 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할 수 있다.

제6조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도 급 중령교민에서 각 5인 강원, 황해 각도 급 미주교민에서 각각 3인을 선거한다.


5. 대한민국임시약헌

[시행 1940.10.9.] [임시정부법령 제5호, 1940.10.9., 전부개정] 

       제1장 총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되, 광복완성전에는 광복운동자 전체에게 있다.

 

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며, 또한 법률의 범위내에서 자유 및 권리를 가진다.

 

제3조 대한민국의 국민은 조국광복, 사회개혁, 헌법 및 법령의 준수, 병역의 복무, 납세의 일체 의무를 진다.

       제2장 임시의정원

 

제4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한다. 다만, 국내 각선거구에서 선거실시가 불능할 때에는 임시정부의 소재지에 교거하고, 각당해선거구에 원적을 가진 광복운동자가 각당해구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한다.

 

제5조 임시의정원 의원의 수는 57인으로 하되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도 및 중국령의 교민은 각각 6인을 선출하고 강원, 황해각도와 미국령의 교민은 각각 3인을 선출한다.

 

제6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만 18세에 달하고 공민권이 있는 자는 선거권을 가지며 또한 23세에 달하고 선거권이 있는 자는 피선거권을 가진다.

 

 이하 생략...




6. 대한민국임시약헌

[시행 1944.4.22.] [임시정부법령 제6호, 1944.4.22., 폐지]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 임시약헌은 폐지함.


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정



1. 20년 10월 중화민국 국민당 총리 손문의 광동(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광동호법정부는 그 당시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중화민국 국민당 총리 손문의 광동(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에 당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을 대표로 특파,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외에도 한국유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수용하고 조차지를 허용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할 것, 5백만원을 차관할 것 등의 5개조 외교에 성공했다. 

.출처: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 필자 주 2).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광동호법정부가 그 당시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손문 주석은 중국의 현대 국부로도 일컬어지는 분인데, 현재의 중국 정부가 광동호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중국과 꾸준한 학술교류를 하면서 여러가지 사항을 형편에 맞게 반영하면 도움될 것입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동호법정부... 이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동호법정부는 손문이 죽은 뒤 국민정부...

. 출처:중국(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1).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한사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대략적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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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신한청년보()》·《공보()》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을 광둥[]의 쑨원[]이 세운 호법정부()에 파견하였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3).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국사편찬위 자료와 국가보훈처 자료로 살펴봄 

가). 국사편찬위 자료


자료 대한민국사 제 1권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   
연월일1941년 12월 09일  
출전성명서 1941년 12월 0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
吾人은 三千萬 韓國人民과 政府를 代表하여 삼가 中, 英, 美, 加, 濠, 和, 墺, 其他 諸國의 對日宣戰이 일본을 격파케 하고 東亞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복하여 玆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韓國全人民은 현재 이미 反侵略戰線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써 樞軸國에 宣戰한다.
2) 1910年의 合邦條約 및 一切의 不平等條約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反侵略國家의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旣得權益을 존중한다.
3) 韓國, 中國 및 西太平洋으로부터 倭寇을 완전히 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血戰한다.
4) 일본세력 하에 조성된 長春, 南京政權을 절대로 승인치 않는다.
5) 루즈벨트 처칠宣言의 各條를 堅決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키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며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願祝한다.
大韓民國23年 12月 9日
大韓民國臨時政府

성명서 1941년 12월 09일

나). 국가보훈처 자료

(출처는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 훈남훈녀입니다).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 출처: 네이버 민족혼닷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大韓民國臨時政府 對日宣戰聲明書)』


우리는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을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를 재조하는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특별히 아래와 같이 성명을 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병조약과 일제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 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      석  김      구

                  외무부장  조 소 앙

. 필자 주 3).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온라인 기자단이 쓴 자료에서는 일제로 오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다른 기사를 보면 일체가 맞습니다. 오자등이 발견되어도 사실관계나, 법적인 타당성, 그 사상등에 영향을 끼칠수는 없으며, 오자를 수정할 책임은 집필자나 발행자가 가지고 있는건 맞겠습니다. 오자를 발생시키는것은 주로 정치가나, 세일즈맨, 또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분들이 자주 애용하는 기법인데, 해당분야에서는 이게 의도하는 소정의 효과를 발생시킬수 있지만, 정부자료나 학술서등은 오자 발생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교정.보완해가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필자도 세일즈맨 활동을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일부러 오자를 발생시킨적이 있었습니다. 

. 필자 주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가 12월 9일인지, 10일인지는 작성시기나 발표시기등 어디에 초점을 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직까지는 12월 9일과 12월 10일 두 가지 다 통용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의견제시를 하지 않는것으로 하며, 확언하지 않겠습니다.        

4.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임시정부 승인.

......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에 대한 필자의 견해. 

1). 국사편찬위 자료.

1) 韓國全人民은 현재 이미 反侵略戰線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써 樞軸國에 宣戰한다(국사 편찬위 자료).

2). 국가보훈처 자료.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

3). 필자 견해. 

그 당시 추축국(축심국)인 일본, 독일, 이태리등에 대하여 1941년에 선전포고를 한 사실은,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한 시점부터 국제법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법상 한국의 해방이전에 1944년 이미 임시정부로서 국제법적 자격을 획득하였는데, 임시정부 상태였기때문에,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강력한 대한민국정부와는 약간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국제법상 임시정부로 인정받은 자격이 있기 때문에, 1944년 승인시점부터 이미 한일병합(경술국치)은 무효고,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도 무효였습니다. 기존에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무효의견(이에서 비롯된 한일병합도 당연 무효)에서 유추하는 한일병합무효론도 중요하지만, 임시정부의 한일병합 무효선언은 이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거가 되겠습니다.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대한제국이 실질적인 강행법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이에 따라 한일병합도 당연 무효),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의견(국제관습법 측면),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의견에 따라, 형식적인 자격은 가지고 있던건 맞습니다.

따라서,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대한민국정부 출범이전까지는, 형식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과 전통이 유지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국내법과 국제법상 다음의 두 법적 주체가 상당한 실질적 지배능력을 가지고 있던 복잡한 형태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다 음 -

a). 국내법: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에 승인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 때부터 1910년의 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 추축국에 대한 선전포고 자격이 국제법과 국내법상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음.

b). 국제법: 1945년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한국영토에 주둔(미군정은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의 하부 실행자이지, 대한국민을 점령할 자격은 없었음. 점령대상자는 일본총독부와 그 산하기구에 적용하는게 옳음)하게 된 미군정.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 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것과는 별도로,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이후부터, 일본등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격에 따라, 일본이 강제로 점령해왔던 대한제국(한국)영토에서 일본의 주권은 인정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나 기타 일본이 한국영토에 설치한 모든형태의 교육기관과, 일본이 강제로 포교한 종교(일본 신도, 불교, 기독교)의 주권은 한국영토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이는 상당한 강행법적 특성을 가진것입니다. 물론 국제연맹이나 UN에서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한 사실에서도, 원인이 잘못된 을사조약에서 이루어진 한일병합이 무효라고 결론짓는것도 변할수는 없습니다.

일본등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한 그 시점부터 일본의 공식 항복문서를 받지 못했어도, 한국영토에서는 패전국이자 UN적국이 된 일본에 대한 승전국(또는 準 승전국)자격을 가진 정부입니다. 그런데 국제법 측면에서 조약으로 맺어진 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국의 항복문서를 받아내거나 해당국가에 승전국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거나, 승전국으로 배상금을 받아내겠다고 조약을 체결한 바가 발견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국제법적 효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국내에서 선언적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그래도 선전포고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토에서는 한국이 이들 추축국에 대한 승전국.準 승전국 자격을 가져도 무리가 없을것).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판단해보는, 미군정시기의 성균관대(성균관장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여 이후,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계승해 옴), 그리고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에 평가.    

1. 미군정 군정법령(軍政法令).


1). 군정법령에 대한 설명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헌법에 의하여 실효(失效) 또는 대치(代置)되어 가다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진주(進駐)와 함께 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전략상 필요한 경우에 군정장관이 내린 법령. 예를 들면 '신문등 정기간행물의 허가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88호)등이 있다. 1947년 6월 3일 미군정청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되고, 그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헌법에 의하여 실효(失效) 또는 대치(代置)되어 가다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었다.    


.출처: 군정법령[軍政法令](두산백과)


2). 위키문헌에 나타나는 미군정 군정법령 제 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 

한글 전용 표기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 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  



1945년 10월 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B. 아놀드


가). 미군정령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법령은 그 당시에는, 전통적 국내법 우위론으로 볼때, 을사조약이 무효(한일병합도 무효)인 대한제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의 법률들이었음.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령은 형식상 대한제국에 승인받지 못한 국내법에 해당되고, 미군정령은 형식상 대한제국에 승인받지 못한 국제법에 해당됨.


국내법상 을사조약 무효론(따라서 한일병합도 무효)을 가진 대한제국이었는데, 형식상으로는 대한제국이 국내법과 국제법상 주권을 가져온게 맞음. 그러나 현실은 대한제국이 강행법적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던 시기이기도 하였음. 


결국 美軍政令은 대한제국의 형식상 동의를 거치지 않은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상위법의 근거를 두고 파생된 국제법상의 하위 군정령인데, 국내법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잠정적이고 임의적인 불완전한 물리적 통치기구였음. 


그 자격으로 보면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주권자인 황제가 民으로 주권을 옮기겠다고 동의한적 없는 임시적 통치기구였다가,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그 때부터는 국내법상 합법적 자격을 형성해왔음)나, 미군정이나 그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합법적 동의과정이 없던 비합법적 통치기구였는데, 비합법적 상태에서도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던 통치기구는 국제법(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근거를 둔 미군정이었음.    


나). 따라서, 비합법적 상태에서도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던 미군정령 15호의 다음 사항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어 효력이 없어도, 성균관이나 성균관대로서는 역사적으로 당연히 지적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음.


- 다 음 -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대한제국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불완전하고 비합법상태의, 국제법에 해당하는 미군정령! 그런데, 미군정령은 그 당시 실질적으로 강력한 물리력을 가져서 사후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비합법적이었더라도 그 동안의 실질적인 영향력행사에대해서는 법이 제정되어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이상 과거의 통치로 파생된 부작용들에 대해 다시 법적규정으로 대응해야 되는 불편한 특성이 있음. 다행스럽게 미군정법령이 완전폐기된것은 성균관.성균관대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임. 


3). 미군정령의 상위 국제법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임. 따라서, 미 군정법령 15호에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서울대로 변경한 부분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으로 해석하여야 하겠습니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일본이 항복한 그 시점부터 경성제국대학의 주권은 한국 영토에서 없어진것(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입니다. 미 군정법령 15호로 경성제국대학 명칭을 서울대로 변경했어도, 한국 영토에 주권이 없어진 경성제대를 명칭변경한것에만 의의가 있으며, 서울대는 한국영토에서 주권도 없고, 한국의 대학 학벌이나 지위를 가질수 없습니다.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은 일본의 항복서명이 있었으므로, 일본도 항복서명 이후부터는 이에 따라야 하겠습니다. 포츠담선언의 이 부분을 수용한 항복시점부터 일본의 주권은 한국영토에 없어졌으며, 일본이 대한제국 영토에 설립한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나 기타 다른 일본 강점기 학교들(일본 불교인들에 영향받아 세워진 불교학교 후신 동국대, 기타 일본 관립전문학교 후신인 전남대.경북대.부산대 초기부분, 서울시립대) 및 여타의 초.중.고교 및 기타 총독부가 강제로 포교한 종교[일본 신도, 일본 불교, 기독교(주로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 일부]들은 포츠담선언에 의하면 한국 영토에서 학교주권이나 지위가 없어진것이며, 강제 포교종교들도 주권이나 자격이 없어진 것입니다.  


4). 한국의 전통적 국내법(대한제국 기준)으로 보면, 그 당시, 국내법상 대한제국의 형식상 승인을 거치지 않은 미군정령의 서울대(경성제국대학에서 변경됨)는 한국영토에서 주권이나 학벌.지위가 없었습니다. 국제관습법인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나,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 이전에 행해진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로 보면 미군정법령 15호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학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 영토에 없었습니다. 


5). 미 군정법령 15호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가 제 1조에 나오고, 제2조에서 성균관이 나와도(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서울대가 성균관 앞에 서는 자격을 획득한 건 절대 아니며, 성균관의 역사나 성균관의 그 당시 관련 종사자들을 관리.통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2.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 설립 결의

1). 첫번째 전국 유림대회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


1945년 1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임.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조선일보 보도기사.


西曆  一千 九百 四十 五年. 

檀紀 四千二百 七十八年 十二月 十日(단기 사천 이백 칠십팔년 십이월 십일).    月曜日(월요일), (二).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全國 儒林大會에서(전국 유림대회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일치단결하야 지난 十一月(십일월) 三十日(삼십일)부터 六일간 시내 성균관 명륜당[成均館]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엿다. 남북조선의 유림 천여명이 모힌가운데 임시의장 김성규[金成圭)씨사회로 성대히 대회가 진행되엿는데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하였다. 당일 피선된 역원은 다음과 갓다.  


* 顧問[고문] 李承晩[이승만]  金九[김구] 
* 委員長(위원장)  金昌淑[김창숙]

2). 두번째 유림대회

가).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 조직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출처: 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나).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 성균관장을 겸임하던 김창숙 선생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한 사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출처: 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성균관(해방후에 전국 유림대회를 거쳐, 성균관장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여 성균관대로 교육기능이 계승됨) 교육과 관련한 국사 편찬위원회의 서술. 


1). 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은, 일본강점기에 공자묘경학원등으로 왜곡되다가, 군정법령 제 15호 제 2조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성균관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법령 제 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해방후 미군정당시 두번의 유림대회를 거치면서,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이자, 성균관장의 위치에 있던 김창숙 선생이 미군정에 교육기구로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등록하여 인가받아서, 국사 성균관의 최고 교육기관 자격은 해방후 미군정 당시에,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아오고 있습니다.     


2). 국사편찬위원회 ]        


국사편찬위원회우리 나라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각종사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집, 보존, 편찬 보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되는 국가 기구. 경기 과천시 중앙동.

이칭별칭국사관()
유형단체
시대근대
성격국가기관, 국책연구기관
설립일시1946년 3월(국사관), 1949년(국사편찬위원회)

정의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각종 사료를 체계적으로 조사·수집·보존·편찬 보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 운영되는 국가 기구.

연원 및 변천

1946년 3월 국사관설치규정이 제정·공포되어 경복궁 집경당()에 국사관()이 처음 설치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국사관은 1949년에 문교부 직속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등 한국사 기초사료 편찬에 주력하였다. 1965년에는 전임 위원장 직제가 마련되었고, 초서로 된 원본 『승정원일기』를 탈초하여 편찬하는 대규모 사업을 비롯하여 『고종시대사』·『한국독립운동사』·『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자료대한민국사』등을 편찬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영역을 넓혀 갔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사』와 『한국사론』 등을 편찬 간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한국사 미개척분야에 대한 연구를 넓혀 갔다. 1987년 1월경기도 과천으로 청사를 이전하고, ‘사료의 수집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법률기관이 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


1.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방침을 내세운이상, 그 때부터 다시 미군정법령의 15호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로 명칭변경된 서울대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 영토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을사조약의 무효, 한일병합의 무효, 대일 선전포고등을 행하여서 그렇습니다. 

그 이전에는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전에는 국제법상 인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일본강점기에 설립된 경성제대나 기타 일본 강점기 학교들의 주권이 없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경성제대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가 국립대로 되었어도, 임시정부 기준으로 보면 선전포고한 적대국가의 적국재산에 해당하는 적산재산을 국유화한 국립대개념일 뿐이며, 한국 영토에서 주권이나 학벌.지위를 형성할수 없어왔던 Negative Heritage일뿐입니다(현재나 미래에도 마찬가지).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민주공화국 상태의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은 UN이란 거대한 국제기구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아도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정부형태입니다. 없어진 대한제국이 불법정부라고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 이런 정부는 국제법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보편적으로 합법성을 승인받기 이전에는 몇 몇 국가에게만 승인받고, 비합법상태로 지배력을 행사하다가 이전의 합법정부를 소멸시키거나 무너뜨리고 불법상태를 극복하여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면, 많은 나라들과 국제기구에 가입한 나라들이 승인하여 합법정부가 되는경우가 발생합니다. 불법상태의 정부였더라도 이전의 합법정부에게 승리하면 새로운 합법정부가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정부는 황제가 주권을 가지던 대한제국을 대체하여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정부체제를 출범시키면서, 기존의 대한제국정부가 강력하게 제지하거나 반대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순식간에 UN을 통하여 합법성을 가지게 된 정부입니다.


이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다고 하였기 때문, 대한제국은 1948년 단절되고, 임시정부의 자격과 선언(민주공화국이지만 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에 대한 선전포고)은,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에 승인받은 국제법적 자격까지 소급해서 별 저항없이 계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던 대한제국상태였기 때문에, 1944년 임시정부의 승인시점부터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저지나 반대가 없어서 순탄하게 부분적으로 국제법적 자격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며, 국제법상의 미군정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던 시기에도 미군정만큼의 국제법자격을 가지게 된 것이고,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후에는 국내법적 자격까지  인정받게 되다가, 현행헌법에서는 헌법전문에 반영되어 강행법적 자격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을사조약 무효라는 고종의 주장과,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이론(국제관습법),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나중에 UN 국제법위원회도 을사조약 무효라 함)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민주공화국 상태의 대한민국 정부출범이 있기 전까지는, 실질적 지배능력이 없었어도,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의 권리도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국제법상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1944년 승인한 이후 대한제국에 승인받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국제적 합법성을 가지게 되었음)나 미군정은 대한제국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전혀 발휘될 수 없던 과도기에 출현한 불가피한 지배기구로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합법성을 가지지 못하던 통치기구(국내법의 임시정부, 국제법의 미군정)였습니다만, 나중에 대한민국정부의 출범으로, 대한제국이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고 제지하지 못하게 되어, 실질적으로는 인정받게 된 지배기구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는 임시정부를 승계하는 방침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시 임시정부의 선언(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에 대한 선전포고)은 자격을 가지고 계승되게 되었습니다. 현행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헌법 전문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으로, 강행법적 자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다 음 -


대한민국 헌법(출처는 법제처 국가법령 정보센터).

대한민국헌법

[시행 1988.2.25.] [헌법 제10호, 1987.10.29., 전부개정] 공포법령보기 src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제1장 총강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①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②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①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②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

       ①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②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① 정당의 설립은 자유이며, 복수정당제는 보장된다.

②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

③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

④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 필자 주 5).  황하문명의 영향을 받아 漢字.유교.漢나라 太學(國子監)등에 영향받아온 수천년 유교문화 한국입니다. 역사적인 기자조선이후 공식 역사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위만조선, 삼한시대, 부여, 예,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대한제국), 그 이후의 유교 제천의식,조상제사, 관혼상제(冠婚喪祭), 삼강오륜(三綱五倫),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忠孝 교육등의 유교 전통문화.민족문화의 계승.발전 및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가까이는 일본 강점기인 을사조약 이전 대한제국(조선)의 합법적 국교(國敎)였던 유교의 전통문화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6]. 일본 강점기인 한일병합 및 그 이전.이후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한국영토에 세워진 일본의 국립대 및 일본 관립전문학교들(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등), 또는 다른 형태의 교육기관.

1. 서울대. 경성제국대학의 후신. 경성제국대학은 1946년 대학이 아니던 일본 강점기 전문학교나 다른 전문학교급의 학교를 통합하여 지금의 국립 서울대로 바뀜.  

경성 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 요약:1924년 일본 정부가 서울(당시 京城府)에 설립한 관립 종합대학.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日帝)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교수와 학생의 구성에서도 차별을 받아 1926년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5명,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41년에는 교수 140명 중 1명, 학생 611명 중 216명만이 조선사람이었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관제가 공포된 후 예과(豫科)가 먼저 개설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설립되면서 초대총장으로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취임하였다.

1926년 2월에 법문학부 교사가 준공되어 학부가 개강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청량리에 예과교사, 1927년에 의학부 교사가 준공되었다. 1928년에는 법문학부 본관을 준공하고 조선총독부 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관하였다.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치과전문학교·경성이학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 출처:두산백과.

2. 전남대. 전남대 홈페이지 설명. 일본강점기에 세워진 관립학교 후신들이 일본강점기 부분을 백과사전등에서 언급하지 않는것 같아, 이 부분은 영구보존함.

190906.10광주농업학교 설립
192006목포상업학교 설립
194403.31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
194709.26문교부 중등교원양성소 부설
195005.05대학원(의학과)인가
05.27도립 광주초급농과대학, 도립 목포초급상과대학 설립인가
195108대성의숙(사립대성대학) 설립인가
09.16국립 전남대학교 건립 기성회 결성 
국립 전남대학교 건립 기성회장에 전라남도지사 박철수씨 피선 
도민에게 본교 건설비로 634,760,000원을 할당
10.06본교 설립 인가
11.04귀속재산인 전남도 제사주식회사의 26,637주 및 공장일체를 634,760,000원에 매수
12.01본교 임시사무소를 광주 의과대학에 설치하고 책임자로 이병위 교수 취임
195201.01국립 전남대학교(5개 대학을 종합)로 발족 

- 공과대학(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섬유공학과,전기공학과)을 신설 

- 도립 광주농과대학을 농과대학(농학과, 임학과,축산학과)으로 개편 이관 

- 사립 대성대학을 문리과대학(문학부: 국문학과, 영문학과, 철학과, 사학과, 

- 정치학과, 법학과, 이학부: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으로 개편 이관 

- 도립 목포상과대학을 상과대학(상학과, 경제학과,무역학과)으로 개편 이관 

. 필자 주 6). 광주 농업학교나 목포 상업학교는 관립전문학교 수준은 아님. 전남대는 광주의학 전문학교 부분이 일본 강점기와 가장 강하게 관련되었으며, 나중에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인 서울대의 추종세력이 전남대.경북대.부산대등이 된것은 부정할 수 없음. 광주 초급 농과대학이나 목포 초급 상과대학으로 변경되어 전남대로 이어져서 전남대 홈페이지에 등재된 것 같음.

3. 경북대에 대한 두산 백과의 설명.

1946년 9월 대구사범대학(1926년 대구사범학교로 설립)·대구의과대학(1932년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설립)·대구농과대학(1944년 대구농업전문학교로 설립)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51년 10월 대구사범대학·대구의과대학·대구농과대학을 모체로 국립 경북대학교로 개편하였다. 이때 사범대학·의과대학·농과대학과 함께 문리과대학·법정대학을 신설하여 5개 단과대학에 24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2008년 상주대학교와 통합하였다

. 필자 주 7). 대구 사범학교는 그 당시의 전문학교는 아니고 현재의 고등학교 정도임. 중요한것은 일본 강점기에 대구의학전문학교나 대구 농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이 부분이 나중에 경북대로 이어진것.    

4. 부산대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1946년 5월 부산수산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인문학부와 수산학부를 둔 국립 부산대학으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자유·봉사이다. 1946년 9월 수산학부는 부산수산대학으로 분리되었고, 1953년 문리과·법과·상과·공과·의과·약학 등 6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 필자 주 8). 부산수산전문학교는 두산백과에 의하면 일본 강점기인 1941년에 부산 고등수산학교로 설립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1946년 수산학부를 둔 부산대학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부산수산대학교는 지금은 부경대학교로 변했습니다.   

다음은 두산백과 내용입니다.

부산수산대학교는 1941년 관립 부산고등수산학교로 설립되어 1944년 부산수산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6년 국립 부산수산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9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5. 서울시립대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1918년 5월 1일 개교한 경성공립농업학교를 모체로 하여 1950년 6월 서울농업초급대학으로 설립하였다. 교훈은 진리·창조·봉사이다. 1956년 4년제 서울농업대학으로 승격하였고, 1973년 농업대학에서 산업대학으로 개편하여 서울산업대학으로 개칭하였다.

 

. 필자 주 9). 서울시립대도 일본 강점기에 설립되어, 1956년에 서울 농업대학으로 승격함.

6. 동국대.

역사에서 잘 아시다시피, 한국은 여자나 불교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을 두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불교 승려는 천민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 신도 밑의 민중신앙인 민중불교인들이 한국의 천민신분 승려들과 연계되어 일본 불교까지 보급시킨 것 같습니다.  

동국대의 전신은 1906년 설립된 명진학교라고 합니다. 그 명진학교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 불교에 영향받은 불교연구회에서 설립한 불교학교입니다.

불교연구회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을 받아 정토사상을 종지(宗旨)로 1906년 2월 홍월초(洪月初)·이보담(李寶潭) 등이 창립하였다. 일본 정토종은 13세기 부처의 본원을 믿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기만 하면 즉시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상으로, 초기 불교의 이념에서는 벗어나 있으나 15세기 일본 불교의 유력한 종파였다.

1904년(광무 8)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던 궁내부의 管理署가 폐지되자, 불교 중흥과 교리 연구를 목적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에 불교연구회 본부를 두고 지방의 각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불교연구와 함께 새로운 불교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고 전국 사찰의 젊은 승려들을 모아 학문과 불도를 가르쳤다


@ 동국대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906년 5월 불교계에서 동대문 밖 원흥사()에 세운 명진학교가 전신이다. 교훈은 섭심, 신실, 자애, 도세이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학교, 1915년 중앙학림()으로 개칭하였으며, 1922년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22년 전국의 불교사찰에서 재산을 출자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고, 1928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개교하여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하였다.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동국대학으로 승격하고 초대학장에 허윤()이 취임하였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78년 경주시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1983년 경주 한방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91년 의과대학부속 경주병원을 개원하였다. 2005년 일산 동국대병원 및 한방병원을 개원하였다....

.출처:동국대학교[Dongguk University, 東國大學校] (두산백과)

 

7. 일본강점기인 1905~1945.8.15 전까지 한국 영토에 설립되어, 해방한국의 대학과 불협화음을 내는 대학교들.   

1). 연세대. 출처는 두산백과임.

.........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재한 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에서 서울 YMCA내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으로 개교하였다.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고, 1923년 신교육령에 따라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4년 대학의 재산을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한 총독부가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고쳤으나, 1945년 8.15광복이후 연희전문학교로 복귀하고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발족하여 초대총장에 백낙준(白樂濬)이 취임하였으며, 1977년 원주에 제2캠퍼스를 설립하였다.

다음은 두산백과에 나오는 세브란스 의학교 부분입니다.

1885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H.N.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초기의 이름은 광혜원을 모체로 하여 1899년 한국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 자유이다.

1904년 L.H.세브란스에게 기증받은 기부금으로 근대식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고 의학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7년 전문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교명을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변경하였으나 1945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복귀하였으며,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6년제)으로 개편하였다.

  

. 필자 주 10). 연세대는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연희전문과 구한말에 세워진 제중원의학교(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가 됨)가 1957년에 연세대로 통합된 대학입니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그렇지 않은데 연희대학교(연희전문에서 이어짐)가 한국인의 대학과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연세대 전체가 불협화음 을 내는 대학으로 변했습니다.  

2). 고려대. 출처는 두산백과임.

1905년 이용익(李容翊)이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이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당시 2년제 법률학·이재학(理財學)의 2개 전문과를 두었다가 1907년 법률학과와 이재학과를 법학과·경제학과로 고치고 3년제로 연장하였다. 교훈은 자유·정의·진리이다. 

1915년 전문학교 시행규칙에 따라 교명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하였다가 1921년 재단법인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보성전문학교로 다시 개명하였고, 1922년 조선교육령에 따라 전문학교로 정식 인가되었다. 

1932년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의 경영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중앙학원으로 재단을 확립하였다. 1934년 교사를 현 위치로 이전하고, 1944년 일제의 강요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하였다.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하고, 정법·상경·문과의 3개 단과대학을 두었다

. 필자 주 11). 고려대는 일본강점기에는 전문학교였었습니다.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전문학교였는데 친일파로 규정된 김성수가 인수하여 해방후에 대학교로 승격시키고나서 친일파 신문인 조선일보(방응모).동아일보(김성수, 고려대는 동아일보처럼 김성수가 소유하거나 운영함)에서 일본 강점기 잔재인 서울대 뒤에 붙어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또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일본 강점기 카르텔을 형성해 온 대학입니다.     

. 필자 주 12). 위에서 사례로 든 대학들외에 일본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전문학교나 일반 교육기관에서 해방후에 대학으로 변한 대학들은 다수 있습니다. 서울대 뒤에 연세대.고려대등으로 일본 강점기 잔재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을사조약이후 1945년까지의 일본 강점기 잔재로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들 대학의 추종세력이 된 대학들이나 세력들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 필자 주 13). 自然人에 대한 인격존중과는 달리(그러나 헌법에 따라 자연인도 어느정도 제한을 가하기 시작해야 함),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8. 일본 강점기 국립.공립 학교 및 일본 총독부의 강제 포교종교들은 일본 신도, 불교, 기독교입니다. 이는 그 당시 일본의 종교형태를 그대로 이식한것에 해당되는데, 일본은 신도와 불교가 주종입니다. 기독교는 아주 세력이 미미합니다. 한국에 강제 포교된 기독교는 주로 개신교며, 가톨릭 극소수 성당입니다. 이들 강제 포교종교는 한일병합후에 강제 포교되어서 종교주권은 없지만 현행 헌법과 연계시 종교의 자유는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을사조약이 무효라 한국은 유교국 그대로인데 교육분야.종교분야의 왜곡발표등 대중언론등에서의 한국 (주권무시) 약탈이 너무 심함.

2차대전때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하여서, 일본 총독부령 83호로 강제 포교시킨 일본 신도.불교.기독교의 종교주권은 한국에 없음.

@ 친일 반민족행위 관계사료집 1.조약과 법령(2007년 발행됨.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저자임)은 조선 총독부령 제 83호 포교규칙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IX. 종교(296)

1. 포교규칙(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 83호) 296

제 1조. 본령에서 종교라고 부르는것은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를 말한다.

제 2조. 종교의 포교에 종사하려는 자는 아래 사항을 갖추어 포교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서류와 이력서를 첨부하여 조선 총독에게 신고해야 한다. ............

@ 일본 총독부령 83호에 의한 포교종교인 신도.불교.기독교의 강제 포교사실을 모를때는, 통계청 표본조사로 발표된 종교인구 조사를 근거로, 글을 쓸수도 있었겠습니다. 정부발표자료니까 이를 근거로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부자료나 학계.국회.언론계.시민단체등에서도 통계청 종교인구 조사에서 비롯된 종교인구 조사자료를 근거로 종교인구를 산출했을 수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필자처럼 2007년의 자료(친일 반민족행위 관계사료집)를 접한 관계자도 생겨났습니다. 일본 총독부령 83호로 신도.불교.기독교가 포교되었다는 사실이 나타났으므로, 1983년부터 시작된 종교인구 표본조사는 일본 강점기 잔재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본강점기때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폐지하면서 성균관과 향교에 문묘제사(공자님제사, 석전대제)의 제사기능만 남겨놓았는데, 전국민이 유교도인 한국에서 1983년 통계청 표본조사할때 유교인구 집계하기를 일본강점기 기준(외래 포교종교인 불교.개신교.천주교)으로 종교주권도 없는 그 종교기구에 등록된 신자들을 우선 집계하고, 유교인구는 일본강점기때 허용한 문묘제사(석전대제,공자님제사) 인구 수십만만 유교인구로 변질시켜 놓았음. 그리고 그 표본조사를 자꾸 10년 단위로 써 먹고 있음. 그렇게 해도 일본강점기 포교종교인 불교.개신교.천주교 종교인구는 종교주권이 한국에 없고, 조선성명인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는 유교도임은 변하지않음.

일본강점기에 제사기능 허용한 문묘제사(석전대제)인구 수십만만 유교인구로 집계하는 국제법위반.美蘇軍政令 취지위반은 아주 심각함. 종교주권도 없는 일본 강점기 불교.기독교 종교인구 집계도 타당하지 않거니와, 전국민이 조선姓名 복구령으로 조선의 한문성씨.本貫 사용하며 관습적으로 설날.추석.단오 지내고, 조상제사 지내고, 冠婚喪祭 참여하고, 孔孟의 三綱五倫 배우는 나라에서 유교인구를 수십만 문묘제사(석전제사) 인구로만 집계하는 발상은, 국제법에 맞지않고 美蘇軍政의 조선성명 복구령 취지에도 맞지않음. 한국인은 美蘇軍政令때의 조선성명 복구령등으로 현재 남한 5,000만, 북한 2,500만이 전부 조선성명 쓰는 유교국가임(유교성명을 사용하며 설날.대보름.단오.추석.한식,조상제사, 관혼상제,공맹의 삼강오륜 교육받음).

해방후, 유교국으로 복귀하여 불교승려를 국사에서 8천 천민으로 교육시켜온 한국. 승려들은 대체적으로 조선시대처럼 산속에서만 있으면서, 시중에 포교하지 않으면 무리는 없음. 신도.불교.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일본 강점기처럼 마음대로 포교하면 않되고, 믿어도 그 종교주권은 없으며, 그 종교신자로 집계하여 발표하여도, 한국은 미소군정때의 조선성명 복구령에 의한 유교국가임.

7]. 임시정부의 헌법반영 부분으로, 헌법에 의해 반드시 1910년의 합방조약(강제.불법의 한일병합)등을 무효로 하고, 일본강점기 잔재세력(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그리고 일본총독부 강제 포교종교들) 및 제반 잔재를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1.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대는, 일본강점기 이후의 대한제국(조선)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600년 넘는 역사 이어짐)과 구한말에 성립된 제반 교육기관들이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악담이나 호언처럼 대중언론.입시지.학원.과외업체.일부 학교.일부 정부기관등에서 철저하게 왜곡되어온 위기 상황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헌법에 반영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필자(宮 성균관대 임금, 윤진한)와 御 서강대 임금님(서강대 기록보존소 서 진교 교수)의 교감하에 앞으로 그렇게 헌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으로 일본 강점기 잔재 학교들인 경성제대 후신(서울대) 및 기타 여러 학교들에 헌법으로 대처하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점은 수천년 인류 역사를 담은 세계사는 교과서.참고서.백과사전.학술서들의 정설이기 때문에, 과거의 세계사 기득권자들이 2차대전 패전(이태리의 볼로냐 대학 및 로마 가톨릭, 로마제국의 역사와 전통등), 중국의 공산화(세계사의 황하문명은 유지되고 한나라 태학.국자감의 세계사는 유지되었지만 문화혁명으로 인해 세계사의 학술적 유교와 달리 일정기간 중국 유교가 제반 분야에서 아주 크게 위축된 점등)로 인해 어떤 오점을 새롭게 보유하게 되었어도 세계사는 바뀌지 않아왔기에, 전통적 세계사 기득권을 존중해주는 전통은 그대로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2. 그래서 다음 사항은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불법.폭력으로 대한제국(조선)정부가 주권행사를 하지 못하고 불법.폭력에 의해 와해된 정부를 대체해 불가피하게 임시정부 특성을 가졌던 만큼, 기존에 반영되어 헌법前文에 반영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문구와 연계시켜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다음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범위내에서, 주로 한국내에서  임시정부의 특성을 반영하고자 합니다. 

1). 세계사나 국사에서 국제관습법이나 관습법등의 타당함을 가지고 가르쳐온 교과서 상의 정통대학들[a). 세계사: ㄱ). 유교문화권 :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에서 경사대학당, 북경대로 이어짐), ㄴ)). 가톨릭문화권: 수도원의 대강당에서 시작된 이태리 볼로냐대학, 교황윤허 파리대학, b)한국사: 조선(대한제국)의 유일무이한 최고대학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이어짐)]

2). 전통 세계종교인 유교나 가톨릭(그리고 브라만교, 유태교, 불교, 이슬람교등도 역사가 오래된 종교임)

3). 세계 4대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나일문명. 그리고 이에 더해 에게문명)

4).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성인들(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부처. 단 이 부분은 신학적 성인이라기보다 철학적 성인의미에 해당됨)

5). 수천년 역사에서 형성되어온 왕조시대의 역사와 이에서 비롯된 종교.교육.문화.경제.일상생활적 전통문화등의 역사성 등 

3. 해방 후 미군정 당시 일본 총독부에 근무하던 한국인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아베 노부유키 같은 패전국 총독이 망언을 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권리를 신경쓰지 않았던 미군정입니다. 총독부 관리로 근무하던 한국인들에게 해방 한국의 틀을 짜도록,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무지했던 미국과 미군정 이었기에, 미국의 책임도 상당부분 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당시 한국 국내법이나 국제관습법상 인정될 수 없던 밀약(밀약은 조약이 아니며 비공식 Memo정도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으로, 이런 밀약에 근거해 폭력과 탐욕에 의해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한점은 가쓰라.태프트의 구체적 합의사항인것 같지도 않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당사자인 대한제국 동의없이 시행된 비공식 Memo정도로, 그 당시 한국의  국내법기준, 조약으로 발효되도록 인정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국내법으로 전혀 인정될 수 없던 제 3자들의 밀약일뿐, 한국국내법상 합법성을 가질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미국은 한국의 중요한 우방국이 되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대한 무지나 오해, 또는 이념적 불일치등이 있었어도 중국, 그리고 세계적인 지배세력이던 서유럽과 교황청, 미국, 러시아등과는 한국이 적절한 조화를 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8]. 결론

  

헌법전문 임시정부 법통계승 부분은 강제 불법의 한일합병이 국내 헌법상 무효로 확실하게 반영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10년의 강제 불법의 한일합방조약 및 기타 그 이전.이후의 일체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발생한 일본 강점기 잔재들(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은, 1988년의 헌법 제 10호에 따라 한국 영토에 주권이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이전에는 헌법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아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강행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던 상태였는데, 늦게나마 반영되어, 이제라도 그 법적 효력을 여러방면에서 검토해 볼 때 입니다. 먼저 헌법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 문구와, 제 1장 총강 제 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조항은 역사와 전통의 중요성을 헌법에 반영한 것입니다. 고구려 태학을 이어서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이어짐)으로 이어진 유일무이한 최고대학(유교만 최고대학을 두어옴)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고 전통문화로 계승.발전하고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해야 하는 조항으로 성균관(해방 후 성균관대로 이어짐)을 중시해야 하는데, 국사편찬위의 성균관 교육은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므로,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자격은 국사 성균관의 자격처럼 중시해야 하겠습니다.

미군정 당시에 법률로 언급된 대학은 미군정법령 15호의 경성제국대학(서울대로 변경), 공자묘경학원(성균관으로 변경) 두 대학밖에 없었으므로,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인 자격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은 성균관장이 전국 유림대회를 거쳐서, 성균관이란 이름대신 성균관대를 선택하여 미군정에 등록하여, 그 이후로는 국사편찬위의 성균관자격과 역사를 승계한 최고대학으로 이어져오면서, 대중언론이나 다른 입시지의 이질적 견해와 맞서온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다가,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발간으로 다시 해방후의 성균관대가 국사에서 배우는 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을 승계한 대학으로 법제화되어 그 법률적 자격을 확고히 보장받게 된것입니다. 한국입장은 을사조약이나 한일병합이 원천무효입니다. 한국기준으로는 을사조약 무효(한일병합도 무효)이던 상태에서,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없이 강제점령상태로 세워진 일본 강점기 잔재라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르면, 경성제대등은 일본기준으로도 한국 영토에서 주권을 가질수 없고, 한국영토에서 축출해야되었던 일본 강점기 잔재입니다. 그리고, 1944년에 승인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보면, 한일병합 무효.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선언으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고 축출해야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군정당시에 미군정법령 15호로 경성제대를 서울대로 변경시킨다고 하였어도, 이는 한국에서 대학의 학벌이나 지위를 보장해주는 개념이 아니라,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는 일본 강점기 잔재를 국유화하는 적국재산의 국유화(적산재산 국유화)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미군정당시 경성제대의 주권이나 지위는 한국영토에 없었으며, 축출대상이었으므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은 미군정당시 법령에 언급되었어도 한국영토에서 주권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 주권이 없고 축출해야 되는 대상이었을 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임시정부를 승계한 대한민국 정부기준으로 보면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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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교육기구로서 성균관대= 국사교육에서 나타나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을사조약이 무효고,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등에 의해 원래부터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었습니다. 미군정령에 의해 복구된 성균관의 교육부문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공자님 제사는 현재의 성균관으로 계승됨)는 미군정당시부터 지금까지 국사 교육에 의해(국사에서 성균관을 정부 교육으로 시행해 옴),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최고 학벌 지위를 계승해오다가, 한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학술적 의견(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됨)에 의해, 법령으로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최고학벌 지위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면서,그 6백년 역사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 국사 편찬위 자료중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I.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을사조약에 뒤이은 한일병합이 무효라고 판단하기때문, 전통적인 국내법 우위론에 따라 대한제국의 형식적.법률적 주권은 대한제국 황제에게 있었다고 주장함.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주권이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皇帝에서 民(국민)으로 교체되었다고 봄. 글자 그대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그 특성을 정확하게 구분하는게 적절하다고 판단함. 국내법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부분은 대한민국 수립후에 임시정부를 공식 승계하여 이 때부터 임시정부의 모든것을 소급하여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졌음. 대한민국 수립이전에는 국내법상 형식적.법률적 주권자는 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상태에서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있었음.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병합 및 불평등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를 선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주권이 帝에서 民으로 교체되었지만, 헌법前文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 구절이 있기때문, 正史에 기초한 한국 역사서는 중요한 지침을 가진 자료라고 여김(세계사와의 병행 이해도 필요). 


II. 본문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1].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사 3책 > 본조기(本朝紀) > 태조 대왕(太祖大王), 기원후 6년


정축(丁丑) 6년이다.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에게 명하여 여진(女眞)을 불러 안무하니, 여진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귀화하여 역(役)을 담당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것을 편호(編戶)와 동일하게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하를 칭하고, 섬라국(暹羅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헌상하였다. 【두 나라가 다 서남해도(西南海島) 가운데에 있다.】

○ 호부(虎符)를 만들었다.

○ 성균관(成均館)을 건립하였다.


2].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국사교본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전기(국기 3725-3900년, 태조-명종 말) 

5. 초기의 관제·학제·과거 및 기타 


초기의 관제, 학제, 과거 및 기타에 대하여 알기 쉽게 표로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관제


동반(문관)   

서반(무관)    

 (2) 학제


성균관 태학    
이상은 유학에 관한 학교이나 또 중앙과 지방에 외국어학과 의학, 율학, 천문지리학 등을 가르치는 각 기관이 있음.



 

3].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1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 Ⅴ. 이씨조선


(2) 새로운 국가 조직

나라의 새 제도


처음부터 급작스런 개혁을 피하고, 민심의 움직임과 더불어 발을 맞추어 나가려던 이조의 국가 조직은, 경국대전의 완성으로써 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관제는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즉 문관과 무관으로 크게 나뉘어졌고, 동반의 최고 관직으로는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가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옛 이야기에서 듣는 영의정, 이조판서 등의 관직은 이 때에 된 것이며, 지방은 전국을 8도(八道)로 나누고, 4부(四府), 48도호부(都護府), 20목(牧), 82군(郡), 175현(縣)을 두었다.


교육은 유교의 장려와 더불어 고려 시대보다 더욱 발달하였다. 이조 시대는 고려와 같이 문벌을 중히 여기는 귀족 정치와 달리, 양반 계급의 관료 정치였기 때문에, 출세의 길로서 과거 제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균관, 사학(四學), 향교와 같은 교육 기관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교육을 받는 곳이 되고 말았으며, 과거의 시험 내용이 경서(經書)와 문예에 기울어짐에 따라 유학(儒學)을 주로 공부하게 되었다....


 

4].  제 2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2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 Ⅳ. 조선 시대의 생활


1. 조선 왕조의 성립과 그 발전

조선의 개국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적의 침구를 물리쳐서 그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명⋅청 교체라는 대륙 정세의 변동에 편승하여 정권을 손에 넣은 후, 토지 개혁의 실시를 통하여 민심을 거두더니, 마침내 신세력의 추대를 받아 선양의 형식으로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1392).


태조 이성계    

조선 왕조의 개창은 역성 혁명에 의한 왕조의 교체에 불과하여, 사회 구조의 본질적인 변혁은 없었다. 태조는 처음 고려의 옛 제도를 그대로 도습하여 영합주의적 정치를 폈으나, 차차로 새 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기본 국책은 억불 숭유, 사대 교린, 농본 민생의 삼대 정책이었다.


왕권의 확립


태종은 태조의 삼대 정책을 실천에 옮겨 왕권 확립에 힘썼다. 즉, 사병을 혁파하였고, 국도를 한성(지금 서울)으로 확정하였으며, 호패제를 실시하는 등 집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사찰 정리, 5부 학당 설립, 유교 예속 생활의 여행을 통하여 유교 사회 건설에 힘썼다.

세종은 전제상정소를 두고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를 개편하는 한편, 민족 문화 육성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주변 지역으로 국세를 확장하여 동북 6진과 서북 4군을 설치하여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국토를 완성시켰다.


교육과 과거 제도


서울에는 최고 학부로 성균관이 있었고, 그 하부 교육 기관으로는 사학(동⋅서⋅남⋅중)이 있었다. 지방 각 고을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양반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서민층은 부락마다 설치되었던 서당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의 초등 교육을 받았다. 주로 중인 계급이 담당하던 기술직의 교육은 의학, 산학, 율학, 역학, 음양학 등의 교육 기관에서 실시되었다.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에는 문관 고시인 문과와 무관 고시인 무과, 그리고 기술관 고시인 잡과의 3종이 있었는데, 문과가 가장 중시되었으며, 주로 유학의 교양을 시험하였다. 문과는 다시 자격 고시인 소과와 채용 고시인 대과로 구별되었는데, 소과는 생원 자격을 부여하는 명경과와 진사 자격을 부여하는 제술과로 되었다. 무과는 무예를, 잡과는 기술 기능을 시취하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 실시하는 식년시가 원칙이었으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부정기 고시가 있었다.


5]. 3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 Ⅲ. 조선 사회 > 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3) 조선 초기의 사회 구조

교육 제도와 관리 선발 제도

조선 초기에는 교육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 학교를 증설하고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였다.

인문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과 4개의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군현마다 향교를 두어 각 지방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이었으나, 정원 외의 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성균관   서울 명륜동 소재. 조선조 최고의 교육 기관. 초기의 입학 정원은 200명이었다. 사진의 건물은 공자를 모신 대성전이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는데, 농번기에는 방학을 맞아 농사일을 돕고 농한기에는 기숙사(재)에 거처하면서 공부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농사와 학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 교육은 의학, 역학, 이학(吏學), 산학, 율학,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등으로 나누어 해당 기술 관청에서 가르쳤다. 기술 교육은 특히 지방적 특성을 고려하여 교육 내용과 학생 수를 조정하였다. 예컨대, 서북 지방에서는 한학을 중요시하고, 동남 지방에서는 왜학(倭學)을 장려하였다.

관리는 원칙적으로 학생 중에서 뽑았는데, 학생이 관리로 나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문 학생이 생원, 진사를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하고 다시 문과를 통과하여 요직으로 나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 학생이 잡과를 거쳐서 기술관으로 나가는 길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을 거쳐서 서리나 하급 관료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고, 요직으로 나가고 승진이 빠르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과거 시험은 수공업자, 상인, 무당, 승려, 노비, 서얼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나, 뒤에 차차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고시 제도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 가장 정비되고 확충되었으며, 신분 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인쇄 문화가 발달하여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교육의 발전은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6]. 4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상) > Ⅲ. 근세 사회의 발전 > 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2) 정치⋅사회 구조의 개편

정치 구조


조선 왕조는 체계적인 기본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만들고, 법전에 준거하여 정치를 시행하는 수준 높은 법치 국가로 발전하였다.

중앙의 기본적인 정치 구조는 의정부와 6조의 체제로 편제되어 있었다. 의정부는 최고 관부로서, 재상의 합의를 통하여 정책을 이끌어 갔다. 재상권과 합의제의 발달은 우리 나라 정치 제도의 한 특색 있는 전통으로, 정책의 최고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지만, 재상의 합의를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교육과 과거 제도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유교주의 국가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 기관을 증설하고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켰다.

인문 교육 기관으로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 정도였으나, 정원 외의 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7]. 5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상) > Ⅳ. 근세 사회의 발전 > 2. 근세의 정치와 그 변천


(1) 정치 체제의 확립

정치 사상


조선은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는 데 그 이상을 두어,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를 이루었다.

고려 말기부터 추진해 온 숭유 정책은 새 왕조의 기본 정책으로서,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들어온 주자가례의 채용, 소학 교육의 장려 등으로 유교는 상류 사회로부터 민중의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교육과 과거 제도


교육 제도는 관리 양성 또는 과거 준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학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비하여 교육 기관이 증설되고, 교육의 기회도 훨씬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문관 양성을 위한 유학 교육만이 숭상되었고, 기술학인 잡학은 천시되었으며, 무관을 위한 교육 시설은 거의 없었다. 인문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었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 정도였으나, 16세기 이후로 내려올수록 정원 외의 학생이 증가해 갔다. 학생들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서당(서재)에서 한문의 기초를 익히거나, 4학이나 향교에 진학하여 소과에 응시하였으며, 합격자는 생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 유생 및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특정한 기술을 시험하는 잡과의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문과 지망자는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 시험을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 다시 대과인 문과에 합격해야 요직으로 나갈 수 있었다.1) 무과 지망자는 무예 시험을 거쳐 무과에 합격해야만 높이 등용되었다. 무과의 실시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부분이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고 있었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는 서얼과 중간 계층이 많았다.


과거 제도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인 취재를 거쳐서 서리나 하급 관리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이외에도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또, 학덕에 의한 천거로 관료에 임용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문음에 의해 특별히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 문화의 발달로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는 관학 이외에 서당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와 같은 교육의 발전은 과거 제도의 정비와 함께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8]. 6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상) > Ⅴ. 근세 사회의 발달 > 2. 근세의 정치적 변화


(1) 정치 체제의 확립


집권 체제의 정비


새 왕조의 기틀은, 태조 때 개국 공신인 정도전에 의해 다져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저술하여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새 왕조는 통치 질서의 정비와 함께 국호를 조선으로 고쳐 고조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도읍을 교통과 국방의 요지인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교육과 과거 제도


유교 이념에 기초한 조선 왕조는 교육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하였다.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학문의 심화를 위해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계시켰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 정도였으나, 16세기 이후로 정원 외의 학생이 증가해 갔다. 학생들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서당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거나, 4학이나 향교에 진학하여 소과에 응시하였으며, 합격자는 생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 유생 및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의 대성전(서울 성균관 대학교)   

향교(전북 장수)    

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특정한 기술을 시험하는 잡과의 세 분야로 나뉘었다.

문과 지망자는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 시험을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 다시 대과인 문과에 합격해야 요직으로 나갈 수 있었다.1)

무과 지망자는 무예 시험을 거쳐 무과에 합격해야만 높이 등용되었다. 무과의 실시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분야가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았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에는 서얼과 중간 계층이 많았다.


과거 제도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인 취재를 거쳐서 하급 관리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또, 학덕에 의한 천거로 관료에 임용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문음에 의해 특별히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 문화의 발달로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는 관학 외에 서당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와 같은 교육의 발전은 과거 제도의 정비와 함께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각주 1) 관리가 요직으로 나가거나 빠른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하였다. 비록,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교육의 기회가 양반에게 거의 독점되다시피 했으므로, 일반 양인층이 합격하는 예는 많지 않았다.


 9]. 7차 교육과정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 Ⅵ.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교육 기관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또,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한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의 연령은 대개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III. 마무리 의견.


역사적 대학이나 기득권이 만든 대학은, 주로 Royal계열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성균관대(泮宮.學宮,太學으로도 그 자격이 언급되는 Royal, Historic대학)가 이 Royal대학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宮 성균관대.

수천년의 문화.언어.종교.정치(군사력).재력및 전쟁과 갈등, 협력과 반목끝에 先占權과 자격을 가지게 된 세계사 교과서(참고서 포함)나, 한국사 교과서(참고서 포함)의 대학들은 그 자격이 거의 변하지 않아왔고, 앞으로는 침략이나 약탈(UN에서 침략금지하고 있음)도 힘들어져, 그 자격들이 거의 그대로 유지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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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

    종합대학

  • 개교일

    1398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

    은행나무

  • 면적(㎡)

    627,025

  •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요한 비오 12세의 허락으로, 대학설립을 기획하여, 1955년 창립사업이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Wisconsin) 관구에 이관됨으로써,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서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킬로렌(Killoren,K.E.)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와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증설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IV]. 나라가 침략당했을경우, 결국 최종 승전국가(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처럼 일본에 선전포고한 準 승전국)의 역사의식이 대학 학벌이나 다른 자격도 결정하게 됩니다.


1]. 성대는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학벌입니다.



성균관은 미군정시대에 이미 미군정법령등으로 복구되어, 성균관대는 국사편찬위에서 가르쳐온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교육부문으로 승계, 제사는 성균관으로 분리)해온 자격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한국정부에서는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발간시 국사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은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국가적 定說로 채택하였으므로, 한국의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임을 인지하여 대응하시면 좋을것입니다.  


한국의 최고 대학 학벌은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서 이어진 600년 역사의 성균관대입니다. 泮宮.學宮의 Royal대학이며 태학의 별칭을 가진 역사적인 성균관! 성균관에서 이어진 한국 최고(最古,最高) 대학 성균관대.


문제는 한국에 주권없고 학벌없던 일본 잔재 학교들(그 대표가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이 대중 언론에서 그 추종세력을 만들어, 국사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에 대해 도전해오고 있는 것인데, 현행 한국 헌법은 을사조약(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경술국치)이 무효고, 일본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대중언론이나 학원광고등이 어떻든 한국의 최고대학은 대통령령으로 인정된 성균관대(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에서 이어진 600년 역사 인정)입니다. 여기에 세계사 개념을 병행시키면 교황성하께서 윤허하신 서강대가 성균관대처럼 Royal대에 해당됩니다. 세계사는 국사나 국민윤리.한문.국어의 고전처럼 한국의 公敎育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내용이므로 필자가 이를 반영하여 세계사의 강자인 서유럽과 교황청과 세계적 위상을 확립하기 위하여 최근에 교황성하 윤허의 Royal대인 서강대를 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됨)과 같은 Royal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 다른 대학들은 교과서나 참고서의 기준과는 동 떨어진 대중언론의 도전세력들로, Royal대는 아니며,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던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추종세력이거나, 그 개념을 반영시키려하는 대학들로, 한국 영토에서 학벌같은게 없습니다(헌법의 임시정부 개념으로 보아도 그렇게 됩니다).   


한국은 公敎育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2]. 한국은 일본강점기때문에, 헌법, 정부방침, 교과서의 公敎育, 시중의 인식(대중언론 개념임), 일본강점기 잔재에서 비롯된 신문.잡지등의 대중언론(입시학원 포함)이 일치하지 않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학가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대학 학벌의 최종 결정권은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계승한 해방이후의 성균관대(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가 정부 자료나 국사, 세계사, 국내법.국제법등을 종합하여 볼 때 가장 타당하며, 한국정부나 학계, 서강대(세계사의 서유럽.교황청 역할때문, 한국에서는 교황윤허사실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권리를 가짐)등과 협의하여 대응하는게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본 블로그를 통한 최종 조율은 서강대와 협의하여 교과서(국사, 세계사), 정부자료. 백과사전, 주요 학술자료를 이용하여 오랜역사의 기득권자들 역사가 계승되도록, 조정하는게 적절할것입니다.  


Royal대는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성균관대(宮 성균관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성 계승)와 서강대(御 서강대. 교황성하 윤허)만 Royal대학이며, 이외의 대학은 비신분제 대학으로 평민개념의 대학들입니다.




@ 덧붙이는 글


요즘 어디가 배치표가 자주 등장함.






...그러면 느닷없이 고려대가 국가기구 아닌 사설협회인 대교협의 의견으로, 배치표 1번순위 대학이 되고...그 다음 성균관대로 불법혁명에 가까운 시도를 유지하겠다면, 여기 어디가 배치표에 나오지 않은 서강대, 서울대는 이 뒤의 대학이 되는것입니까?

성균관이나 성균관대처럼, 국가적으로, 교과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한번도 나라를 대표하거나 최고가 아니었던, 그저 그런 대학들인 연희전문 후신 연세(사회적으로는 서울대 100번, 국시 110브 연세로 듣고 살아옴. 고려는 이뒤의 별 볼일 없는 대학)뒤의 대학으로 살아온 전문학교 출신의 고려대학이라, 이런식으로 하면, 카이스트.포항공대, 부산대.경북대.전남대등과 이화여대.숙명여대등이 내가 고려대 앞이라고 주장하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런 급격하고 생경하고 조잡한 혁명적 시도들은 분란만 부를뿐, 남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법적으로 강행법 능력도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불법 혁명으로 치부됩니다.       



. 필자 주 1).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으로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지만, 서강대 사학과 출신 양희은씨 같은 경우는 서울대 100번, 국시110브(연세)로도 판단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통용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견해중 하나입니다.

. 필자 주 2).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기존 최고대학 학벌이 유지되면서, 세계사의 참조로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6백년 역사의 Royal대학)와 교황윤허 서강대는 Royal대학 맞습니다. 그런데 현행 헌법에 임시정부가 반영되어, 이 뒤의 비신분제 대학중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등에 의해 원래부터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왔던데다가, 임시정부 반영부분으로 인해, 헌법이론의 법리적차원에서 더 구체적으로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중언론에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의 카르텔로 살아온 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만든 고려대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의 카르텔임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이자 Royal대인 성균관대는 교황윤허의 Royal대인 서강대와 공존하는 방법이 좋다고 여겨 필자는 그렇게 한국과 세계에 알려왔습니다.            


대학은 Royal대로 가는게 학술적.보편적.세계적인 학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입시정보 포탈 어디가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를 먼저 소개합니다.



....교육부와 대교협은 '어디가' 포털이 대학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대학들의 반발을 고려해 합격선을 환산점수, 백분위, 등급 가운데 하나로 기준을 택하고 공개 범위도 상위 70%, 80%, 90%, 전체 평균 중 하나로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마다 다른 잣대로 합격선을 공개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학별 비교는 불가능하다. 어느 경우든 하위권의 점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합격 커트라인은 더 낮을 것이 분명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만족스런 정보도 주지 못하면서 서열화 혐의도 벗지 못한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 필자가 볼때 사실상 대학별 비교가 불가능하면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한편, 한국은 헌법에 임시정부가 반영되었고, 그래서 왜놈학교 후신들은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습니다. 서울시립대나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등.     


 

지금 몇 가지 답변자료 보니까, 교육부에서 만들었다고 작성자가 주장하는 입시정보 포탈(어디가)이 보입니다. 확인해보니까 교육부가 공식 주관자는 아닌것 같고, 한국 대학교육협의회가 주관자로 나옵니다.


 

한국 대학교육 협의회는 정부기관이 아니고, 협회며 사단법인일 뿐입니다. 단체를 만들도록 법률로 허락은 받았지만, 국가기관은 아닙니다. 국가적인 어떤 강행법적 자격은 형성되지 않으며, 다만 사단법인으로 대학교육 협의회의 의견을 정부에 건의하는 사단법인일 뿐입니다.  대학 상호간의 합의도 분명하게 필요한 단체고요. 여기서 어떤 의견을 제시해도 강행법적 능력이 없습니다. 또 의견이 채택되어도 국사편찬위원회의 성균관교육이나,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규정(성균관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승계됨)을 대체시킬수도 없을것이고, 역사와 전통, 그동안의 법률공표에 의해 형성된 국가적 질서를 위하여 성균관.성균관대의 최고학벌에 도전적인 의견은 무효로 기각시킬 필요도 있습니다(필자는 성균관.성균관대의 最古.最高학벌 질서에 도전적인 이런 후발 의견은 기각시키는게 옳다고 판단함).  


국사편찬위원회(국가기관, 국책연구기관, 국사 성균관 교육)나, 정부에서 법으로 보호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정부 출연 연구 기관임. 대통령령에 의해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발간: 성균관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하였다고 규정), 헌법만든 법제처(임시정부 법통만든 법제처)와 같은 정부기관이 관리.감독하여 대학.교육등에 대한 의견을 규정하는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강행법적 자격이 없는 단체가 한국 대학교육협의회입니다. 전국 대학들이 모두 합의해야 하는 제약성도 있는데, 입시정보를 서술한다고 해서 강행법적 자격을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대입정보포털 어디가는 전국의 회원대학 상호간에 아직 합의된 기준도 없는것으로 판단됩니다(그러면 公的 자격이 형성되었다고 판단하기 어려움. 대입정보 점수기준도 회원대학마다 제 각각 다르고, 대학의 새로운 임의적인 순서도 합의는 아주 어려울것 같음).      


입시정보포탈 어디가는 어색하고 생경한것인데, 헌법(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도전이나, 대통령령에 의한 국사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의 公교육에 도전하기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실행한 쿠데타적 자료 같습니다. 어떤 법령에 근거해서 만든 자료인지 몰라도 헌법(임시정부 조항)이나 행정부 대통령령(한국 민족문화대백과), 국사 성균관 교육의 여러가지 정부차원 복합자격과 오랜 전통을 능가하는 법률은 없습니다. 


몇 학교만 나열하고 헌법이나 대통령령에 도전하는 자세로 모험을 감행한 쿠데타적 자료로 보여집니다.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같은 법적 강행성이 준비되었는지 의문이 들고, 아직 강행법적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확정되어 공포된 자격[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규정: 국사에서 가르쳐온 성균관에서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계승됨]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급격하고 돌발적인 도전적 입시정보 포털같은데, 대학간에 이렇게 하자고 합의한 것도 없을것같고, 서울대나 다른 수 많은 대학 다 빼고, 고려대, 연세대는 또 무슨 이상한 순서입니까? 구한말 평민출신 이용익이 만든 보성전문에서 시작되어 해방후에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고려대로 변경한것이고, 일본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일 뿐입니다. 국사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대학 성균관과 비교할 수 있는 대학들이 결코 아닙니다.   


강행법적 자격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후발로, 대학교육협의회 실무진들의 새로운 도전적 의견에 그칠것입니다. 대교협 관계자들의 실무의견을 거르지 않고, 대학간에 합의해 줄수도 없는 후발 임의적인 입시정보 포탈자료인데,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나 국사교육(성균관)을 능가하기는 힘든것 같습니다.   


 

몇 개 대학만 임의적으로 이름을 써넣고 입시정보 포탈이라고 하는것은, 국사 성균관 교육이나 대통령령(한국 민족문화대백과: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에 대한 비합리적인 후발 도전적 자세나, 쿠데타적 발상으로 보여지니까, 작동 못하도록 조치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의문투성이입니다. 한국 대학교육협의회 실무자들이 밀실에서 최근에 만든 도발이나 쿠데타적  의견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성공할 수 없는 쿠데타적 발상! 국사 성균관교육이나 대통령령의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를 이길수 없으면서 도전하는 성공할 수 없는 쿠데타적 발상의 자료가 대입정보포탈 어디가로 판단됩니다.  


 

한국 대학교육협의회의 이런 생경하고 돌발적 도전 자료는, 기능이 작동되지 않도록 사전 제지해야 할 필요가 생겼군요.


 

 대입정보 포탈을 만들어, 몇 학교만 나열하고 이런 자료 만들어서 후발로 덤빈다고 해도, 헌법의 임시정부 법통은 바뀌지 않으며, 대통령령에 의해 규정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 조항은 바뀔 사유가 없습니다. 삼강오륜 교육도 그런 대상의 전통 정부 방침에 해당될것입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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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rti... 2017.11.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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